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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90장 패티숀(petition)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3. 11.

90장 패티숀(petition)

 

 어느새 장사는 8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1988년 그러니까 우리가 이민 온 지 15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패티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패티숀을 맡아서 싸워 보세요" 엄청나게 당황하여 갈 길을 몰랐을 때, 손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말이다.

 1981년에 장소가 좋다는 이유로, 어이없이 비싼 주유소! 집을 담보로 넣고  나머지는 빚더미로 산 헌 건물이 수명이 다 되었는지 마루가 빠지고 화장실이 터지고 지붕이 새고 여기저기 고치다가  터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5 만불 정도를 소비한 후였다. 

1989년 할 수 없이 다시 지으려고 상의한 결과, 쉘 오일회사가 기름탱크와 가스펌프는 20만 불에 지어주고 10년간 기름을 팔며 갚기로 하였다.

가게와 이 층집 건물은 은행에  돈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건물허가를 시에 신청을 한 상태였다. 6개월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상태에서 이상한 편지 한 통을 시로부터 받게 되었다.

우리 가게가 60가인데 64가 코너에 새로 주유소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미 시 위원들의 1차 2차 논의는 통과되었다고 했다.

마지막 3차를 동네사람들의 반대만 없으면 통과시키려는 것이다.

집 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3차 공청회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죽을 듯 살 듯 8 년간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일을 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사람도 제대로 고용하지도 못하고 힘을 다하여 주유소를 살려보려고 애쓴 세월.

이런 식으로 망하게 되는구나. 장사만 하기도 힘든데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우리는 시청으로 달려갔다.

 

“우리 서류는 어찌 된 일이지요? ”“6개월이 넘었는데  깜깜소식이고 이런 편지만 받았습니다.

우리 서류를 찾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수선을 피우던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착오가 생긴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 신청서가 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 짓는다는  주유소만 속성으로 처리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누군가가 일부러 우리 서류를 뒤로 미뤄 놓은 것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땅을 싼값으로 사서 지으려는 사람은, 시를 자주 드나드는  사업가라는 것이다.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쉽게 잡아먹는 다고 하였던가? 캐나다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 우리를 당혹하게 하였다.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란 말인가?

늦게 배운 캐나다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실망이 컸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만일 그 건물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매상이 떨어져  문을 닫고 빈손으로 이곳을 떠야 될 것이다 .

웃음을 잃고 우리는 손님들에게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하였다.

거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이 패티숀을 만드는 것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지역 모임에 참석하여,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날로 우리는 영어가 우리보다 나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불러 패티 숀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때 만들어서 동네사람의 사인을 받았던 패티 숀의 내용  이러하였다.

  나의 이름은 Sun Lee입니다

주유소와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6413-184st에 새 주유소와 가게를 짓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유는 단 4 블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40년도 넘게 있었던 제 가게를 짓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면 저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융자받지 못하게 됩니다. 

은행에서는 지난 3년간의장사기록과  앞으로의 사업 전망서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Shell 오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게를 지으려고 서류를 다 제출한 상태에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장님과 시 의원님들 그리고 이곳에 사시는 여러분, 새 가게를 짓도록 선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급속도로 들어오는 가게를 막기 위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새 주유소를 반대하는 패티 숀을 맡아야 했다.

동네사람들의 사인을 받을 페티숀 서류를 만들었다.

 

 Petition to surrey council (써리 시에게 보내는 패티숀)

we, the undersigned, are opposed to the application to rezone the property at 6413-184 street from suburban residential to comprehensive development zone to permit construction of a gas bar and/or other commercial facility (6413-184에 집만 짓는 지역에서 상업용 주유소를 지을 수 있는 지역으로 신청한 것을 우리는 반대합니다.)

 name 이름       signature 사인      address 주소    phone no 전화번호

 나는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설명을 하고 사인을 받느라고 온 힘을 다하였다.

며칠 안에 목까지 잠겨 쇠 소리를 내었다.

아내는 종이 장을 들고 집집을 방문하였다.

처음 캐나다를 와서 직장을 구하느라고 다운타운  빌딩을 하나하나 방문할 때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개들이 짖어 대고, 낯설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동네 커뮤니티가 모이는 날 모임에 참석하였다.

다행히 회장은 우리 가게 손님이어서 우리의 딱한 사정에 동정을 하였다.

되던 안 돼 던 최선을 다 해보자 후회나 없도록! 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패티숀은 300명 정도만 받을 수 있다면 아주 성공적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우리는 300명도 넘고 500명도 넘을 때까지  일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 주유소가 생기는 반대편에 있는 가까운 다른 주유소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몇 십 년을 그곳에서 장사한 헤리라는 분도 걱정이 대단하였으나, 워낙 정치적 뒷받침을 가진 강자를 만나서 도리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다음날 저녁에 자기 동네 커뮤니티 모임에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만사를 미루고, 그 날 밤에 그쪽 동네 커뮤니티를 찾았다.

강당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연사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나는 손을 들고 주유소를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한 뒤, 새 가게 짓는 것을 막아 줄 수 없는가를 물었다.

생각지도 않은 동양 사람의 출연에 모두가 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는 차근차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가 이곳이라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사회자는 지금 돌아가는 상태로는 막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나는현제로 500 이상의 패티숀을 받았으며, 이쪽에서도 패티숀을 받아서 같이 싸울 수가 있다고 하였다.

사회자는 이미 500명의 사인을 받았다는 말에 놀라 그 정도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헤리가 자기도 사인을 받겠다고 나섰다. 헤리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도와줄 것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일단 어떤 희망을 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돌아왔다.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 10월 17일 밤이었다.

우리는 780명의 사인을 받았다.

이것은 사실상 어마어마한 수자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보통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해도 150명 이상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커뮤니티 모임에서 알려 준 대로 시에 가서 8명의 시의원의 주소를 찾아내었다.

그 밤으로  42장이나 되는 사인을 적은 패티숀을 10 부를 복사하였다.

가까운데 사는 시의원 집에는 직접 배달을 하고, 먼 곳은 편지로 띄웠다. 거기에 첨가한 내용은 이러하였다.

 

  시 의원님 귀하

제 이름은 Sun Lee라고 합니다. 5996-184st 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8년간 이곳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47년에 지은 낡은 건물입니다.

새로 지으려고 건축신청을 한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건축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6413-184st에 집 지역에서 새로 상업지역으로 주유소를 짓기 위해  신청을 한 것에 반대를 합니다.

그 반대 이유는 이러합니다.

 1) 새로 짓는 주유소가,   저의 클로버힐마켓 Shell 주유소와. 클레이톤 Esso 주유소 사이에 있습니다.

Surrey 시 규율에 따르면 주유소간의 거리는 적어도 1.3마일은 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새 주유소와는 단지 0.5 마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새 주유소를 허락한다면 오래된 두 주유소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또한 이 동네 안에는 충분한 주유소가 있습니다. 새로 짓는 주유소 근방 2마일 안에는 이미 열한 개의 주유소가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주유소 이름을 열거합니다.

 1. 7-11 Esso 주유소 5996-176st

 2. Mohawk 주유소 5604-175st

 3. Shell주유소 17625-56 ave

 4. Chevron주유소 17600-56 ave

 5. Petro Canada주유소-56 ave

 6. Clayton 주유소 18398-Fraser Hwy

 7. Esso 주유소  19712-Fraser Hwy

 8. Husky 주유소 19811-Fraser Hwy

 9. SuperSave 주유소 19395-Langley bypass

 10. Cloverhill Market 주유소 5996-184st

 11. Mohawk 주유소   Fraser Hwy

  3) 이 새로 신청한 주유소는  저의 건물을 짓기 위하여 신청한 돈을 은행에서 융자받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4) 저는 700명  이상의 이 새로 짓는 건물에 반대하는 패티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그 복사를 같이 동봉합니다.

이 장소에 거의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저의 주유소를 새로 짓도록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엔  공청회에 나가서 연단에서 반대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한, 누가 시간을 소비하여 공청회에 나가며 가슴 떨리는 연설을 해줄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고민이었다. 

커뮤니티 회장은 도와줄 것을 선언하였다.

나도  연단에 설 것이다.

우리는 생각다가 그 새로 짓는다는 가게에서 몇 집 건너 살고 있는,

국회의원 존 스몰우드의 집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다행히 조용한 집에 살고 있는 국회의원 존 스몰우드를 만났고,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존 스몰우드는 우리가 맡은  780명과 미스터 헤리가 맡은 500 정도의 사인까지 합하면 1300명쯤 된다는 이야기에 놀라워했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의 사인을 받았으면,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자기가 나가서 동조를 하겠다고 했다.

 

날자와 시간을 노트에 적고, 그날 시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드디어 우리를 도와줄 힘 있는 자의 발언을 얻게 된 것이다.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 왔다. 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시로 향하였다.

그날에 벌어질 몇 건의 공청회로 사람들이 웅성웅성하였다.

우리는 거의 뒤편, 그러나 연대로 나가기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긴장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산다는 것이 왜 이렇게 갈수록 어려운 것인가, 말 안 통하는 이민자가 헤치고 나가기엔  벅찬 시련이다.

우리가 왜 여기서 이렇게 가슴을 조리며 떨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저 열심히 일만 하였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난한 자가 견디어야 하는 고뇌와 시련이라는 것인가?

우리가 믿었던 자유주의 나라에도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이 억울함이 우리를 어둡게 하였다

여기서 이기지 않으면 우리는 빈손으로 캐나다생활 15년을 마무리 짓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야 될지도 모른다.

밴쿠버는 더 이상 우리가 정 붙이고 살 도시는 아니다.

토론토로 갈 것인가 아주 한국으로 갈 것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한 후에 물결 흐르는 데로  가자는 것이 마음을 가다듬는 길이었다.

 시장님이 사회를 시작하고 연단에 시의원들이 양쪽으로 앉아서 회의는 진행되었다.

우리의 방청 회는 맨 나중 순서로 되어 있었다.

국회의원 존스몰우드의 모습은  회의가 거의 반이 지나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을 잊어버린 것일까?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다. 우리 회의가 시작될 무렵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급하게 들어온 존 스몰우드, 존 스몰우드는 나를 데리고  앞자리로 가서 앉았다.

 

TV에 방송할 카메라맨들이, 존 스몰우드의 갑작스러운 출연에, 또 시의원들도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존 스몰우드는 어려운 시민을 돕는 자로 이름이 나있었고 장관을 지낸 적도 있는 이름 있는 여 국회의원이었다.

존 스몰우드는 첫 번째로 손을 들었고 시장이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나를 동반하고 앞으로 나가서 연설을 시작하였다.

자기는 국회위원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고, 자기 집  몇 집 건너편에 시끄러운 주유소를 짓는 것을 반대하러 시민의 자격으로 나왔다고 설명하였다.

초등학교가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열심히 일해 온  미스터리의 로열티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스터리가 지금 새 주유소를 건축하려고 신청을 해놓고 있는데 왜 다른 주유소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거기에 반대하는 한 시의원의 음성도 높아지고 있었다.

왜 자유경쟁에서 미스터리가 대접을 받아야 하고, 전과 후가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존스몰우드를 동반하고 나온 것에 역력히 반발을 표시하였다.

나는 진솔하게 새로운 주유소를 짓는 설명과, 왜 다른 주유소가 더 이상 필요 없는지를  설명하였다.

반대편에서는 주유소가 더 필요하다는 다른 의견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패티숀이 동네사람이 아니고 가게를 지나가는 별 별사람이 사람이 해준 것이라고 반격하였다.

 거기에 아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장님이 아내를  지목하고, 나와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어떨 결에 마이크에 선 아내는  집집을 다니면서 패티숀을 받으면서 겪은 어려움과, 남편이 받은 패티숀이 동네사람인지 아닌지를 주소와 전화번호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루쿠미라는 우리 손님이 여기저기 송이버섯처럼 주유소만 지을 것이냐고 반박하였다.

커뮤니티회장이 나와서 신중하게 반대한다고 요점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이 일은 다시 시의원들이 상의하기로 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B C T V와 신문(1988년 10월 19일 써리프레스)에 존스몰우드와 남편의 분명한 반대기사가  발표되었다.

그 뒤로도 방청회가 있을 때마다 1년도 넘게 우리는 계속 참석하였다.

끈질기게 이것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덕분에 우리를 도와준 커뮤니티의 멤버가 되여 계속 참석하다보니, 말도 잘 안 통하는 우리를 그 당시 컴뮤니티 디렉터로 뽑아주었다. 한쪽 구석에 앉아서 우리를 격려해 준 동네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였다.

 

 우리 주유소는 1989년 여름에 시작하여 1990년 2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건축되었다.

우리의 혼과 열을 다 바친 이 건물 2층에는 살림집까지 넣었으며 , 25년이 지났건만 그때 일을  적으려 하니 아직도 흥분되는 것은, 그만큼 억울하게 타오르던 우리의 삶이 여기에 아직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약한 가족이라도 힘을 합친다면, 어려운 일도 풀어 갈 수 있다는 것을 패티숀에서 배웠다

우리가 반대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닐 때 어리지만 이 패티숀을 만들 어 준 아들이 있었다.

가게를 소리 없이 돌봐 준 딸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자식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용기를 잃었으며 서러운 이민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91장 shell주유소의건축(1989-1990년)

 

 

우리는 동네사람들의 도움으로 패티숀에서 승리를 하였다.

큰 크레인이 와서 쑤세미 처럼 가게를 허무는 데는 몇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가게가 헐리는 날 가게의 첫 주인이 아직도 살아있기에  수소문하여 백인 캐럴 여사를 초대하였다.

아직도 나이보다 정정한 캐럴 여사는  허물리기 전에  딸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하였다.

옛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였다.

주유소를 건축하는 데는  1년이란 시간을 소비하였지만, 믿을 수 없겠지만 가게 문을 닫는 일은 하루도 없었다.

건축하는 중에도 건물을 짓는데 돈을 빌린 TD은행과 SHELL OIL회사 변호사끼리 싸움이 벌어져 돈을 풀어놓지 않아서 건물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로 첫 몰게지로 들어가려는 투쟁이었다.

주인은 나인데 잘못될 경우 투자한 돈을 먼저 받아가려는 변호사들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내 빌딩을 가지고 짓기도 전에 싸우는데 화가 난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7주일 안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SHELL은 나가달라고 내 변호사에게 서류를 보냈다.

할 수 없이 SHELL 기름회사가 2차 모기지로 들어가자 TD은행이 돈을 풀어놓았다.

가게를 뒤쪽에 짓고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밤새도록 가게물건을 다 옮겼다.

그 후에 앞의 건물을 헐어버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1989년 에  50년이다 되도록 버티고 있던  가게는 헐리고 6개월 만에 6000 스퀘어휘트 의 1층 2층 건물이 세워지고 1990년에 빌딩 앞으로 쉘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유소가 건축되었다.

빌딩의 구석 콩크리트에 나의 이름과 건축 날자를 기분 좋게 아내가 새겨주었다.

신나는 일이었다.

새 건물은 넓은 파킹 장을 열고 주홍빛 핑크색으로 튼튼하고 화사하게 서서 사람들을 반기게 되었다.

덕분에 일 년 만에 3배 정도의 매상을 올리게 되었다.

그동안의 고생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준비과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람이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3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도 나는 믿는다.

용기를 가지고 그 기회를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을 것을 배불리 먹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도 나는 믿는다.

나는 하루도 빠짐이 없이 4시 반이면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커피를 만든다. 

아내는 조금 늦게 일어나고 그리고 겨울에는 밤 10시 여름에는 밤 11시에 문을 닫는다.

  습관적으로 문을 열고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우리는 아침에 반갑게 만나는 사람들을 "커피클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커피클럽에서 들은 이야기는 ......,.처음 개척한 파이오니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자리 잡고 살 수 있었다.

자손을 보전하고 유지하려는 파이오니아들의  힘은 강했다.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보이지 않게 자기 자손을 잘 살게 하려는 마음으로 차 있었다.

캐나다 이민 초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