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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86장 (1983년) 은발의 은행장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3. 9.

86장(1983년)은발의 은행장

 

  돈을 빌려준 용감한 젊은 은행장은 영전하여 본사로 들어갔다.

나이가 많은 은발의 은행장이 지점장으로 입성하였다.

우리 서류를 확인할 게 있다며 가져오라 하였다. 은발의 은행장에게 서류를 다 주었다.

나는 은행에 갔다가 우리에게 가게를 판 중국 주인이 은행장과 마주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았다.

우리 가게에도 전  중국주인의  방문이 있었다. 그는 우리 가게가 잘 되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가게를 산 후 2년 이 넘은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좀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구나!

나는  변호사를 찾아가 우리가 3년이 되는 때 주인 돈을 값 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변호사는 가게를 잃을 것이니 은행에 가서 돈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였다.

"어디 가서  전 주인이 빌려준 그 많은 돈을 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나이 많은 은행장이 우리가 쓰는 비자카드와 마스터가드 크레딧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끊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잠을 자지 못하였다.

은행장은 우리에게  선심을 쓰듯 다달이 이자를 내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일 년 후에 한꺼번에 받겠다고 하였다.

왜 은행장이 신용카드를 막아놓고 생각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돈을 내라고 하는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손님으로 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행장은 우리가 서류상에  너무 많은 빛을 안고 있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돈 받을 희망을  버린 은행장은 우리 가게를  남에게 주어서라도 은행 돈을 잃지 않으려는 심산이었음을......, 은발의 걱정 많은 은행장이 돈이 있는 전 주인을 불렀고, 그가 은행장을 만나고 갔을 것이라고,

전 주인이  우리 가게를 권리금도 없이 공짜로 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우리는 빈 털털이로 밀려 나고,  은행은  손해 보지 않고 빌려준 돈만 챙기면 그만이다.

전주인은 신이 나서 돌아갔을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은행에 가서 누가 무슨 이유로 내 신용카드를 쓰지 못하게 했는지 밝히라고 화를 내었다. 

그것이 은행으로 밝혀지자 , 며칠 후에 은행장은 소리 없이 카드사용을 복구시켰다.

 

나는 잘 아는  이민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낙찰 계를 하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참으로 희한하게 운 좋은 일이었다.

아내는 그곳을 찾아갔고 다른 사람들보다 금액을 많이 써놓고 아슬아슬하게 돈을 가져왔다.

우리는 그 돈으로 당장 은행장에게 밀린 돈을 갚았다.

이 인정 없는 은발의 은행장의 돈은 갚았으나 일 년 후에  주인의 돈이 또 문제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전 주인이 빌려준 돈! 돈을 더 이상 안 빌려 준다고 하면 끝인 것이다.

산 넘으면  더 큰 산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것이다.

이곳저곳 은행을 찾아다녔으나 거절당하였다. 할 수 없다. 나는 손님들에게 사정하기 시작하였다.

분명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돈을 빌려야만 한다.

 

어느 날 한 노인 손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침마다 이 앞길을 걸어서 운동을 하는데 당신은 틀림이 없는 사람이요.

하루도 안 빼고 정확하게 아침 5시에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사람을 나는 도와주고 싶소.

내 돈이 이곳에 있으니  찾아가서 내 이름을 대시오  그러면 그 돈을 빌려 줄 것이요.”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고맙습니다. 때가 되면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돈 걱정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해져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또 한사람이 나타났다. “미세쓰리가 우리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접수한 걸 보았습니다.

늦게 소식을 드려 죄송합니다. 미스터 리 같이 성실한 사람이면 빌려드려야지요 "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로열 뱅크 지점장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아내를 불렀다. “이분이 돈을 빌려줄 수 있대요”

“어마, 그래요 .” 아내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전주인과 3년 기간이 끝나는 날로 로열뱅크 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그 돈을 확실히 갚았다.

 

  은발의 노인 은행장, 나는 그 은행을 버리고 나왔다.

노인이 은행장이면  가난한 자를 해칠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 한번의  경험으로 우리는 나머지 세상을 다 배운 듯하였다.

지금생각해도 그 시절에 돈을 빌린 것도 밴쿠버에서 단하나 있던 낙찰계를 찾아간 것도,

손님이 도와준다고 우리손을 붙잡아준 것도  모두가 우리를 도와주신 하늘의 부모님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일해서 빚을 조금씩 갚아 가기 시작하였다.

 

87장 부모님의 조언

 

나는 장모님이 부탁한 말씀을  기억하였다.

"처음엔 돈을 헤프게 쓰지 말아요. 자리 잡을 때까지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자리가 잡히면 그때 돈을 써도 늦지 않는다. 가난을 면하면 돈을 써도 별로 표가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리 잡을 때까지 옷도 사 입지 않았다. 다 떨어진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고 헌 옷가게가 나의 단골집이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는 어머님 말씀처럼 행복하게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언제나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 집을 사도록 보증을 서 준 유비시 대학의 교수님이  있듯이

이번에도 나를 믿어 주고 낙찰계를 소개 시켜주는 따뜻한 친구가 있었고

자기 돈을 아낌없이 빌려주겠다는 점잖은 손님이 있었다.

나의 성실함을 알아준 동네에 사는 로얄뱅크의 지점장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보답하듯 좋은 모습을 보이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지 않으려면 자리가 잡힐 때까지만 절약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이민 떠날 때  간곡히 잘살기를 바라며 들려주신 어머님의 그 한마디가 나를  나를 일으켜 세우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음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 가.

 

88장 아들에게 희망을

 

  아들은 어려서부터 나를 도와 일을 하였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아내와 나는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언젠가 나에게 희망을 걸고 계셨던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 자식을 잘 키우려면 부모의 희생이 필요한 것을 기억하여라. 그것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허기야  운도 따라줘야 하지만,,,,,,. 선평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그때 술이 취하셨지만 기분이 좋아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이젠 네가 이 집안의 기둥이 되 거라!  너를 믿는다.”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조국을 떠나서 이곳에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과 자유와 희망이었다.

그 희망 속에 지금 자식들이 자라나고 있다. 아버지가 내가 잘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자손이 잘되는 것이 지금 나의 희망인 것이다. 아들이 공부에 관심이 없으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들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

 "때를 놓치지 말고 좋은 학교를 보내서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이것은 나의 몫이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나를 희생할 때이다.

언제 내가 돈이 있어서 무슨 일을 시작하였던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시작을 해놓으면 돌아가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늘에서 돌보고 계시지 않았던가?

아들은 그해  5학년이 되면서 입학시험을 보았다.

세인트죠지학교에서는 낙제생을 대치함으로? 그해 5명을 뽑는 광고가 있었다.

수많은 캐나다 학생들이  학교 성적표를 보내어 1차로 50명이 선택되었다. 

다시 이 50명이 실기 시험을 보게 되었다.

밴쿠버에서 제일 좋은 사립학교 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수백 명 중에서  아들은 마지막 그 5명 중에  들어간 것이다.

사랍학교의 기숙사비와 학비, 얼마나 돈이 드는지 생각도 없이?

또 한 번의 계산할 줄 모르는 무지가 희망의 굴레 속으로 입성한 것이다.

 

89장 고난의 세월

   

  아들은 밴쿠버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주말이면 아내가 가서 데려오고 월요일 아침이면 데려다주었다.

사립학교에 들어가던 첫해는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는 시험 때가 오면 성적을 올리기 위하여  빈학교 강당에 가서 조용히수학을 가르치고 돌아왔다.

해가 지나자 성적도 등수 안에 들고 그 학교의 자랑으로 여기는 럭비도 최고 선수가 되어서 학교에서 인기를 날리고 있었다.  우리 형편엔 어울리지 않았던 사립학교 보내는 일, 그러나 아내는 모든 것을 이기고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학교장터로 찾아가 중고로 파는 학생복을 사다가 잘 대려서 주었고 아들은 고맙게도 잘 입고 다녔다.

기숙사비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는데,

친구들이 골프를 치러 오고가다 우리 가게에 들렸다.

일 만하고 살고 있는 나에게 자식을 사립학교까지 보내느라 고생이 많다며 자신들의 삶을 자랑하였다.

 

 "아버지 두고 보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 아이들보다 성공 할게요"

철이든 아들은 주말이면 내 곁에 와서  일을 더 열심히 도와주었다.

그때는 사립학교 보낸 것이 너무 고생스러웠지만 자랑이기도 하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하면서도 아들이 좋은 성적을 가지고 돌아오면 기쁜 날이 되었다.

다행히 전연 이익을 주지 않던 쉘 기름회사를  변호사와 상의한 끝에

나는 조금씩 돈을 받아 내고 있었던 것도 시련을 극복했던 일이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법

그동안 목수가 일을 하다가 화재를 내서 집도 다 타버렸으나 그래도 운 좋게 가게는 남아 있었고

우리는 차고를 방으로 수리해서 지냈다.

우리는 익숙해져서 친구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가족만은 하나가 되어서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한국 사람이 그로서리를 하면 3년 넘기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이것을 천직으로 생각하면서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아버지를 도운 그 시절에 이미 훈련이 되었기 때문 일 것이다.

나는 하루 16시간을 쉬지 않고 일만 하면서 살고 있는데 한국소식은 달랐다.

 형수가 아이들 학비가 부족하다며 밭 하나를 팔아달라고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비를 한다기에 공증 하나를 만들어서 보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공증은 동생이 서대문 상가와 집을 파는데도 사용된 것인지? 아내가 서울을 방문하여 형수는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돌아온 아내의 말에 의하면 동생은 그 당시 감히 국회의원이나 타는 지프차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다. 술 냄새로 불안하게 운전하며 비행장에 나왔다고 했다

서대문 상가를 팔았는지? 집도 대궐 같은 새집에 살고 있었고 집안은 처가식구가 모여 있었다.

아내를 방어라도 하듯이 건너 방에서 파티소리가 요란했다고 했다.

화는 나지만 그렇게라도 잘살면 잘되었다. 아내 역시 욕심이 많으면 힘들 터인데 한국의 부동산에 대해선 우리가 힘들게 번 돈이 아니니까 라고 했다.

아내는 한국이 어려울 때 한국 돈을 가지고 나와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을 떠나도 나라를 사랑하는 이민자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