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장 커피클럽 이야기들
새벽 5시에 주유소 문을 열면 1시간쯤 노래를 불러주는 새가 있다.
노랫소리가 높은 전나무 위에서 유난히도 맑다.
어둠 속에서, 새벽을 여는, 노란 가슴을 가진 새의 이름은 알고 보니 로빈이다.
로빈이 어디론지 떠난 뒤, 까마귀가 깍 거리며 날라든다.
파킹 장을 두리번거리며 먹이를 찾아다닌다.
어둠이 깔렸던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면, 거리엔 차들이 기세를 펴고 지나가기 시작한다.
이 시각에 비가 오나 눈이오나, 모이는 클럽이 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아침이면 하나 둘씩하나둘씩 즐거운 참새들처럼 우리 주유소 안으로 모여든다.
떠들다가 하나둘씩 떠나가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남아서, 커피 향을 더 채운다.
가게를 운영하는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이곳을 드나들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커피 클럽이라며 즐거워한다.
그들의 세상 이야기는 끝도 없이 펼쳐나간다.
아는 것도 많고, 웃음소리도 많고, 모르는 것은 듣고만 있으면 알게 되는 신나는 모임이다.
체구가 거대한 우크레니안 2세인 K 씨는 퇴직한 분이다.
문을 여는 새벽 5시에 와서 커피를 만들어주고, 나의 안전을 보살펴 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분의 아버지 는 일차 대전 직후 1921년 18세에 캐나다 이민광고를 보고, 단독이민 온 사람이다.
그 당시 위니펙 시에 정착한 그분은 100불을 주고 땅 230 에이커를 사들이고, 후에 결혼하여 이곳에서 출생한 7명의 아들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땅을 개간하여 5000 에이커가 되었다.
2차 대전에서 큰아들을 잃었다. 첫 이 민자들에게도 전쟁의 슬픔은 찾아왔다.
그 당시 위니펙 시에는 우크라니안이 집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땅을 개간하여 농사짓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해마다 씨 뿌리기 전에, 그 넓은 들판에는 시니카루라는 야생 약초가 머리를 들고 나와 봄소식을 알렸다.
이것을 온 가족이 나가 채취하여 돈을 벌었다.
이 약초는 first nation (인디언) 들로부터 배운 것으로, 제약회사에서 끝도 없이 사들였고,
이 일은 현재도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문전옥토에서 된장 값이 안 나온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이아니었다.
각 나라대로 그런 말이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 신기롭다.
이분은 농사로 시작해서, 주유소며, 직장생활을 하며 힘과 땀 속에서 밝은 삶을 이루었다.
젊어서 권투 선수를 했다는 영국의 T 씨는, 신문 한 장을 사기 위하여 아침마다 먼 길을 걸어 나온다.
2차 대전 당시 낙하산부대에 있었다.
히틀러가 만들어 논 곳을 직접 처 들어가, 불에 타는 사람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분이다.
그는 전쟁 중에서 만난 독일소녀와 사랑을 하고 같이 이민을 왔다.
전쟁 중에서 피어난 애틋한 사랑이야기,
그 당시 전쟁간호사로 일하던 아내와 피워낸 사랑 얘기를 들으면, 윌리엄워스 워즈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보시오
저기 젊은 한 쌍
말없이
소리 없이
이리로 걸어오네.
전쟁의 푸른 역사
사라지기 전
그들의 사랑 얘기
그칠 새 없네.
그는 2년 전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새가, 아내의 영혼이라고 믿고 있다.
하루는 새를 위한 놀이터까지 만들어 놓고 , 아내가 즐기던 꽃들을 다듬어, 무지개 색깔로 장식된 화원을 우리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었다.
전쟁 통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을 아직도 안고 있는 분, 그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그의 맥박 속에 흐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전기 기술자 S씨는 작은 키에 단단한 모습이다.
1968년에 아슬아슬하게 도망 나온 사람이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 날, 초콜릿 바 몇 개와 물통을 들고 무조건 산속으로 숨었다 한다.
무장지대에서 잡히면 총살당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 국경을 넘었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분은 7일 동안을 낮에는 숨고, 밤으로만 숲 속을 기어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3달간 수용소에 있다가 밤배를 타고 이곳으로 온 사람이다.
캐나다동부 몬트리올 시에 도착할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 지하 철 역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토론토로 가는 차를 얻어 타고 무일푼으로 도착하였다 한다.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여 한 달에 45불을 벌었는데, 제일 초라하고 몸 하나 의지할 방 값이 50불이어서(시간당 50전) 밥도 굶고 울면서 다녔다한다.
1불 50전을 받기로 하고 일자리를 옮겼으나, 주인이 3불씩을 주었다 한다.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집을 짓고 팔기도 하여 부를 이루어놓았다.
그 당시를 회고할 때면 흥분하여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상기된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희망찬 하루하루를 기분 좋게 살게 된다는 것을 그분으로부터 배운다.
불란서에서 온 C 씨는 한국말로 “안녕 하세요” 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므로,
우리도 깍듯이 “안녕 하세요” 하고 절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분은 한국이 돌아가는 소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나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다.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것, 정을 주고 싶은 사람이다.
필립 핀에서 온 M 씨는, 영사관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다.
그는 골프 치는 한국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자기는 돈이 없어 연습 장 밖에 갈 수 없는 신세라고 한탄한다.
골프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이 친구 하자고 할 것이니, 나처럼 "산을 찾아가서 건강을 찾으시오"라고 하면
“골프가 더 재미있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껄껄 웃는다.
커피클럽의 우크레니 안 2세인 A 씨는 최초의 이민당시 우크라니언 ‘성’ 때문에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고 한다.
결국엔 직업을 얻으려고 ‘성’을 영국식 ‘으로 바꾼 사람이다.
자기 아버지한테 가서 우크라니언 ‘성’ 때문에 친구들 중, 자기만 취직이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니 ‘성’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다 한다.
“무엇이 어째? ‘성’을 바꾼다고? 노하여, 더 이상 말도 안 하던 아버지가, 한 달 후에 가서 바꾸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영국식으로 ‘성’을 바꾼 후 그대로 취직이 되었다며, 초기 이민자의 인종차별 고충을 말해준다.
정부직업을 얻기가 동양인에게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백인이어도 ‘성’까지 갈아 버렸다니 나에겐 놀라운 소식이었다.
철도청에서 900명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인 H 씨는 비대한 체구에 윙크까지 하는 분이다.
집을 3집 가족이 살 수 있도록 ㄷ 자로 붙여 건축하였다.
정원은 다 같이 쓰게 만들었다, 한편에 딸의 집, 가운데는 자기 집, 반대편에 아들집을 지었다.
입구가 따로 있어 불편하지 않게 하여 주고 , 집세를 안 받는 대신,
자기의 노후문제를 자유롭게 해결한다는 현명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분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도 돈을 많이 벌면 그분과 같이 3집을 연결해서 짓고 아들과 딸을 옆에 두고, 같이 사는 꿈까지 꾸어 본 적이 있다. 이민자가 이 땅에서나마,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건 희망 사항이 아닌가?
독일에서 온 J 씨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2차 대전에 미국군대로 징집되었다 한다.
자기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대고 싸울 수밖에 없었던 자기의 묘한 처지를 이야기한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몇 사람의 지도자의 판단으로 전쟁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전쟁이란 회오리바람에 휩쓸렸음을 깨닫는다.
누구를 위하여 젊은이들이 아까운 생명을 바쳐야 하는가?
누가 그 보상을 하고, 그 생명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같은 민족이 서로를 죽여야 했는가?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가슴 아픈 세월을 살다가 간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사람이 있었는가?
세계는 하나로 통일 될 수 없는가? 모두가 하나로 살 수는 없는가?
극심한 민족주의의 발달이, 토지를 확장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나라를 미워하고 점령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신문지상에 한 사람의 살인자는 무시무시하게 취급되면서, 전쟁이라는 이름아래, 이유 없이 수만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것은 용납되고 있다.
한번 왔다가는 생명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생명을 다 누리고 가기를 바란다.
자기가 관리하는 자기의 생명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도 그 생명을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정직하게 잘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 이민자의 아이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전쟁이 나면 부모의 나라에 총을 대는 일들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전쟁은 죽음이고 슬픈 일이다.
그 아무것도 죽음을 보상할 수는 없다.
버트란드 럿셀은 인간이 슬픈 전쟁을 이야기하고 떠들면서도, 전쟁을 일으키고 신문이나 TV로 전쟁을 즐기는 배반 적인 인간의 심리를 탓하였다.
이 심리를 이용한 돈을 벌려는 타락한 살인 영화가 판을 친다.
우리의 자손들을 위하여 세상은 좀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정을 나누고, 바르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
이들을 만나기 전엔, 우리 가족만이 외로운 이민자였다.
지금 생각하니 유독 말 안 통하고, 피부색이 다른 동양 인 만을, 이민자로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그들도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어려움을 느끼고 동등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속을 터놓고 얘기하자면 이민자들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싶어 한다.
이것이 오랜 동안 같은 장소에 머물면서 커피클럽에서 느낀 마음이라고 할까
커피클럽 사람들은 헤어지면서 말한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내일 또 만나요."라고,
93장 1997년 우리의 자유의해
1990년 쉘(shell) 오일회사로부터 오일탱크와 펌프와 캐노피가 멋지게 10 동안 지불하는 계약으로 세워진 후,
건물 빌딩은 TD은행에서 빌렸지만 6개월 만에 매상이 3배로 높아져 모게지 이자와 원금을 25년으로 값이면 되는 것이다. 고용인을 두고 내 나이 36세에 이민 와서 53세에 멋진 큰 건물에서 장사다운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일주일 에서 하루는 우리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하루 동안 골프도 시작하였다.
등산도 걱정 없이 하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러 위슬러로 사이프레스로 시무어로 가까운 미국 베이커 산으로 신나게 달렸다.
누구에게나 온다는 3번의 기회 나는 그 기회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그 긴 세월 동안 다른 사람보다 2배의 일을 하였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 하루만은 보상받을 시간이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하루를 기다려왔다.
이런 시간을 7년쯤 보내는 어느 날, 투자 이민 온 한국 사람이 세를 받고 가게를 빌려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내 나이 60세. 미련 없이 가게 운영권을 넘겼다.
외각지에서 장사한 지 16년이 된 1997년이었다.
우리는 해방의 만세를 부르며 여행하기 위한 모터 홈을 샀다.
미국횡단 여행이 아니라 이번엔 캐나다를 북쪽으로 통하는, 그 유명한 알래스카하이웨이 여행을 준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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