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장 젊은 은행장(1981년)
미국여행 후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엇이든지 시작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경험이 있는 돼지농장을 해 보려고 다시 연구를 하였다.
이곳저곳 농장을 찾아가서 몇 달간 실습을 하였고 현대식 시설을 배웠다.
모든 연구가 끝날 즈음에 내 돈으로는 부족하여 동반자를 찾게 되었다.
나와 같이 해보자며 교회로 알게 된 믿음직한 백인이 있었다.
백인은 나로부터 몇 달 동안 연구한 온갖 안내서를 다 가져간 후에 같이 하자며 땅을 보러 다녔다.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나를 충분히 이용하였고 혼자서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나를 멀리하였다.
실망하였으나 돈이 부족한 나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사람과는 시작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생활비가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아내는 우리가 다시 장사를 한다면 돈을 벌 수가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돈을 번 것은 직장 생활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는 동안이었다.
우리는 2년 7개월 동안 장사에 권리금까지 합치니 상당한 것이었다. 약사는 한국과는 가는 길이 달랐다.
실제로 약국은 자신이 운영하여 돈벌이가 어려웠다.
대형 회사나 약국에 들어가 월급쟁이를 하는 것도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밴쿠버 주변에서 그로세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몫이 조금 좋게 보이는 변두리를 찾았는데 생각보다는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장소가 마음에 꼭 들었다.
복덕방과 사인한 서류를 들고 우리가 거래하던 은행을 찾았다.
빌리는 돈이 너무 많고 매상이 적다고 거절당했다.
우리는 큰 로얄 뱅크를 찾았다. 이번에도 거절당하였다.
세 번째로 오래전에 거래하던 크레디트 유니온 밴 시티를 찾았다.
또다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매상 서류를 보고 거절하였다
심지어 변호사도 망할 것이니 그만두라고 조언하였다.
그래도 나는 돈만 빌릴 수 있다면 꼭 그 장소에서 하고 싶었다.
은행에서 거절만 당하고 머리를 싸매고 누었는데 아내가 말하였다.
집 들어오는 입구에 아주 적은 몬트리올 은행하나가 있는데 그곳을 마지막으로 가볼래요?
"그렇게 적은 데서 무슨 돈을 빌릴 수가? 게다가 한 번도 거래를 한 일이 없는데"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가자는 거예요.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약사가 되든지 다른 길을 찾아야지요."
나는 아내를 따라 작은 은행 입구로 들어섰다. 안내양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돈을 빌리려 왔습니다.
'얼마나 빌리실 것인가요?
나는 금액을 말하였다. 안내양은 그 액수가 적지 않자, 눈을 크게 뜨고 “잠깐 만 기다리세요.
지점장님이 지금 손님과 얘기 중이에요.”
우리는 손님이 나가자 바로 그 방으로 안내되었다. 지점장은 젊은 사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그는 굵고 힘찬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아이를 안고 찾아온 아내를 측은 한 듯 바라보았다.
나는 멈칫거리며 서류를 내어 놓았다. 서류를 보고 난 후, 날카로운 눈초리로 형사처럼 우리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전에 어디서 일 하였습니까?" "유비시 대학 원자력 연구소입니다."
"그래요."그는 대번에 유비시 원자력 연구소로 전화기를 돌렸다.
한참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엔진이어로 열심히 일하셨군요.
그런데 이 서류엔 서류를 정리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는데요?"
"제가 이곳저곳 다니다가 거절만 당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요? 그는 한참을 생각하였다.
이것을 본사에 보내고 답을 얻어 내자면 적어도 2주가 필요한데......, 이 서류는 일주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내가 일주일 동안 뛰어다닐 테니 1000불을 미리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대답을 잃었다.
"이 돈은 서류가 되면 다행이지만 되지 않아도 내가 자비로 써야 하기 때문에 다시 되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하였다.
참으로 듣던 중에 그래도 받아 준다니 반가운 소리였으나 되지 않아도 그나마 남아있는 1000불을 빼앗긴다니......,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 용기를 내었다.
"서류를 접수시켜 주세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서류를 접수 시켜 주십시오."그 자리에서 반짝이는 눈, 나의 용기와 지점장의 용기가 통하고 있었다.
지점장은 알았다는 듯이 이것저것 물어서 서류를 작성하였다.
"자 다 되었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되든 안 되든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자 행운을 빌겠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다투기 시작하였다.
"당신 바보예요? 1000불을 안 돌려준다고 했는데 귀로 들었어요?
천불이 작은 돈인 줄 아세요?"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싸매고 들어 누워 버렸다.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나에겐 10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고통스럽게 뛰었다.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1000불이라는 돈은 참으로 큰돈이었다.
일주일이 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전화통에서 떠나질 않았다.
드디어 전화가 울렸는데 나는 사실을 확인하느라 묻고 또 물었다."미스터리 축하드립니다."
또 한 번 그 소리를 들었는데 믿기 어려웠다.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하느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메시라는 지점장, 용감하게 나를 믿어 주었던 젊은 지점장의 이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조그만 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12만 불을 빌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또 가게 주인으로부터 나머지 돈을 빌렸다.
먼저 주인이 가게를 잡히고 빌린 돈을 그대로 맡게 된 것이다.
내가 그때 빌린 돈은 30만 불이 넘은 것이다.
이 돈이 우리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것인지는 생각지도 못한 채,
또 한 번의 무식과 무지 속에 용기만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84장 1981년 겨울
살다 보면 시련의 시절도 있고 행복한 때도 있다.
나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내의 해산, 아내는 무거운 몸으로 밤이고 낮이고 쉴 사이가 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계속 일하였다.
큰 빚을 지고 가게를 산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우리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면서 이자 내는데 급급해 있었다.
그즈음에 아내는 손발이 자주 붓고 얼굴도 부었다.
아내는 밤이 깊도록 세금 계산을 꼬부리고 앉아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임신부에게 너무 무리였다. 해산을 열흘 남기고 결국에 사고 가 터지고 만 것이다.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기절할 것 같이 아픔을 호소하였다.
나는 아내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사실에서 검사를 하는 중 아내의 신음소리는 더 커졌고 후에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의사가 말하였다. 아이가 배 속에서 탯줄이 끊어져 이미 사망하였습니다.
아이를 꺼내는 과중에 산모가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아셔야 합니다.
나는 말을 잃었다. 여러 명의 닥 터들이 들락 거렸으나 혈액을 기다리는 중 다 소리 없이 다 사라졌다.
나는 복도에서 중국인 의 사를 붙들고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
아내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중국 의사는 내게 말하였다.
의사들이 당신의 사인 없이는 아무도 뒷감당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 내가 사인을 하고 다 책임을 질 테니 상관하지 마시요.
살려 내야 하오. 내가 살려달라고 이런 법은 없다고 소리를 지르자,
의사는 나의 사인을 받고 최선을 다 해보겠다며 나를 진정시켰다.
그 뒤로 얼마가 지났을까 밤이 지나고 낮이 지나고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도 죽을 수가 있구나!" 나는 아내 옆에서 내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는 18시간 만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병원에서는 18시간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간호 원이 떠들고 다녔다.
의사도 나도 이렇게 살아난 것이 기적 같다며 같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내는 중환자실에 보름을 있다가 다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너무나 장시간 혈액의 흐름이 멈춘 상태여서 모든 조직이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내가 퇴원하기까지 나는 이민 친구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 하루하루가 지났는지 모른다.
내가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마다 아들은 우는 어린 동생을 업고 밤을 새웠다고 하였다.
아내는 기적으로 다시 일어났고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너무 힘든 것 같아 그때 마침 가게를 살 사람이 찾아와 가게를 팔자고 하였다.
그때 아내는 말하였다. "이미 아이를 잃어 버렸어요. 남은 것은 오기밖에 없어요.
여기서 이 가게를 성공시키기 전까지 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물러 설 수 없어요."
아내는 얼마동안 우울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하루는 평소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죽는 것보다 남은 두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야겠어요.’
우리는 다시 점벙대며 일속으로 들어갔다.
85장 어려운시절(1981년-1989년)
장사는 다시 시작 되었다.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아들은 국민학교 3학년이었고, 딸아이는 2살 이었다.
여지 것 캐나다 생활 40년 중에 이자가 20%로 오른 적은 그때 밖에 없으리라.
매상은 적었고 내야 될 이자 는 다락같이 높았다.
나는 16시간을 일하였다. 사람하나 쓰지 못하고 일하였다.
거기에 주유소는 기름을 넣어주는 서비스까지 해야만 했다.
3학년짜리 아들은 학교를 같다오면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 나를 도왔다.
하루는 기름을 넣다가 휘발유를 손님의 얼굴에 튀는 사고 가 벌어졌다.
손님은 소리를 지르며 경악하였고 금방 집으로 가서 신고를 하였는지 소방차가 달려왔다.
"이곳에서 어린아이가 기름을 넣는다는데 사실이요?"
"녜 그렇습니다. 이자를 내기가 힘들어서 아무도 고용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장시간에 부은 다리를 보이며 사정을 하고 이해를 구하였다.
그들도 인간인지라 우리가 불쌍했는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고 돌아갔다.
거기에 써리 도시는 동양 사람에게 텃세가 심하였다.
밤이면 지나가던 자동차에서 돌을 던져 유리창이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아들과 같이 담요를 두르고 지붕위로 올라가서 지키며 잠을 잤다.
밤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인간이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결말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생각해 낸 것이 창마다 나무판으로 막아서 12개를 평풍을 접듯 양쪽으로 고리를 달았다.
낮에는 걸어 열고 밤에는 다 닫는 장치를 한 다음에야 유리창은 조용해 졌다.
그래도 집 울타리 안에 안전을 위하여 개를 풀어놓았다.
알고 보니 이 써리 지역엔 유색인 을 죽어라고 싫어하는 KKK 단 이 살고 있었다.
몇 년 후에 한 인도 사람이 가게를 방문하였는데 우리에게 장사하는 데 별 일이 없냐고 물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점 점 나아진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요 저는 이 가게를 하다가 야간 도주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가게 두 번 째 주인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심하였나요?"
"이곳에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의 시련을 생각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 것이다.
한번은 나는 화가 난 김에 빈병으로 동네 청년을 두 둘 겨 팬 적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을 방으로 몰아 넣은 뒤 너 죽고 나죽자고 위협한 적도 있었다.
방이 어지러웠으나 아내는 곧 방을 제대로 정돈하였다. 곧 경찰이 들어 닥쳤다.
"당신이 칼로 사람을 위협하였다는 게 정말이요?"
"그런 적 없습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데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하십니까?"
나는 펄 쩍 뛰었다.
사실은 주위에 부엌칼이 있어서 내가 위험하여 오히려 집어서 싱크대로 던진 것을 녀석이 고발을 한 것이다.
경찰은 이 곳 저 곳 칼을 찾았다. 칼은 아내가 칼꽂이에 치운 뒤라 경찰은 말없이 가버렸다.
어느 인간은 지나가다 말고 가게 문을 열고
"갓 뎀 차이나 맨 고 홈 ( 못쓸 중국 놈 집으로 돌아가)"하고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가기도 하였다.
나에게 가게를 팔고 간 3번째는 유비시 대학을 나온 젊은 중국인이었다.
그가 지나는 길에 찾아와서 우리 아들이 학교를 잘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다닌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우뚱하였다.
알고 보니 가게를 나에게 팔고 떠난 이유가 아들이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실토 하였다.
백인들이 주로 사는 k k 단이 살고 있는 이 외 각지 는 유색인종이 살기가 힘든 곳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낳을 때부터 덩치가 크고 건강하였다.
한번은 온통 옷을 흙으로 뒤 덥고 씩 씩 거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고 학년 여학생이 못살게 굴어서 끝까지 물고 늘어져 밭고랑까지 밀고 들어가 싸웠다고 했다.
그 뒤로 아들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진 모양이었고 활개를 치고 다녔다.
더구나 아들의 구구단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다고 선생님도 학생들도 감탄하였다.
그들은 나만 아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케피탈 힐에서 살 때 아들은 학교에서 오자마자 책가방을 내던지고 옆집으로 놀러갔다.
나는 아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 숙제를 다 한 뒤 놀아라 . 영어책을 열 번씩 읽고 수학도 미리 공부하고 나가 놀아라.
너는 다른 애들보다 열배는 열심히 해야 한다."
나는 구구단을 통독하도록 도왔다.
구구단은 사방의 벽에 크게 써 붙이고, 누워 서도 볼 수 있게 천정에 까지 붙여놓았다.
아들은 잠들기 전에 천정에 붙은 구구단을 10번 외우면서 잠이 들었다.
구구단이 해결이 되니 모든 수학이 쉽게 해결된 것이다.
어느 날 아들친구가 가게를 들어와서 내게 말했다.
아들은 구구단이 귀신처럼 빨라요.
선생님도 못 따라와요."
"그래?"
나는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아들친구에게 아이스크림을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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