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장 집수리
캐나다 사람들은 특수한 기술이 필요한 곳을 빼놓고는 다 자신들이 집을 고치는데 익숙해져 있다.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자들도 땅을 파고 페인트를 칠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여기서 살기위해선 빠르게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배워야 했다.
가만히 보니 집을 짓고 1년간을 새집에서 살고 세금을 내지 않고 집을 팔아 돈을 챙기고 다시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5년이나 7년 정도 걸려서 찾아오는 부동산 경기라도 만나게 된다면,
집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직장이나 일하는 것은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시키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부동산이다.
장사를 끝낸 우리도 쉬는 동안 돈을 더 받고 팔기 위하여 날마다 집을 고치기 시작하였다.
집을 고쳐서 팔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해보지 못한 나에겐 기술이 문제였다.
방과 부엌사이로 벽을 하나 세우고 나니 성취감이 대단했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해내다니!"
그런데 어느 날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벽이 옆으로 팍하고 허물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이럴 수가? 우리가 다 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걸 해놓고 돈 벌을 거라고 나가서 오랜만에 외식도 하였는데 호호호 당신 솜씨 알아줘야 갰네, "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이 신기하고 엄청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는 힘을 합쳐서 열심히 일했다. 일을 하고 새로운 변화가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지부 록을 다시 새로 하고 먼지를 다 쓰면서 벽을 갈아내고 페인트도 칠하였다.
아내는 천정의 지부 록을 붙들고 있다가 팔이 떨어진다고 죽는소리를 하면서도 붙들고 있다가 손목까지 삐었다.
"삶이란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고 누가 말하였던가?" 우리는 정확히 딴따라 유행가를 부르며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쓸고 닦고 카펫을 깔고 방을 만드는데 몇 달을 소비하였다. 카펫을 새로 사자니 돈이 많이 들고남은 카펫 중에서 싸고 큰 것을 고르자니 빨간색 밖에 없었다.
아! 하! 우리는 눈부신 빨간색으로 리빙 룸을 장식하였다.
지금껏 오래 살았지만 그때 우리 집처럼 리빙 룸에 빨간 카펫을 깐 최신식 집은 여태 보지 못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새들이 지푸라기를 부지런히 물어다 부지런히 집을 짓듯이 우리도 값싼 지푸라기 같은 것을 찾아서 집을 계속 고치다 보니 우리 눈에는 그저 보기 좋게 되었다.
78장 미스터리의 울타리
벽이 무너진 것보다도 더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울타리였다. 왼쪽 이웃과는 사과나무와 복 분자나무가 가지를 뻗고 가시를 달고 가득 차서,
우리는 사과도 얻어먹고 검은 딸기를 따먹고 좋아하였다.
그런데 바른쪽 이웃과는 나무 한 구루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이집은 60대가 넘는 뚱뚱한 못생긴 여자가 혼자 살고 있었다.
제비같이 반지르르하게 기름을 바른 남자의 방문이 있었다.
내가 그 집에서 오래된 재봉틀을 50불을 주고 아내를 사주려고 흥정을 하는데
주인여자는 새로 만난 남자 친구라고 털어놓았다.
그 남자는 정원을 손질하고 풀을 깍 고 그 집이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가꾸며 즐거워하였다.
하루는 내가 울타리를 하겠다고 하자 나를 초대하였고 커피도 타주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 노인네는 내가 어떤 울타리를 만들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나도 몰랐으니까......,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나는 막대기를 노동판에서 버리고 간 흔 막대기를 주워 왔다.
그것으로 말뚝을 박을 생각이었다. 한쪽 기둥 끝에서 다음 기둥 밑하고 연결되었고, 또 하나를 엇갈려서 연결하였다.
줄도 안 긋고 박아서 그런지 땅을 파느라고 온갖 힘은 따 뺏는데 모두가 삐뚤 빼뚤거렸다.
똑바로 땅을 파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미처 몰랐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런 울타리는 조선시대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명품 울타리! 나의 처음 프로젝트가 완료되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이런 울타리를 하고는 창피해서 동네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요.
이웃 사람들 더 보기 전에 어서 어서 뜯어내세요."
내가보기도 모양새가 영 아니라서 나는 땀을 흘리면서 다 철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옆집 노인네는 나의 대 작품 후에 나를 반가워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피하였다.
아직도 아내는 만나는 한국 친구들에게 내 처음 기막힌 작품얘기를 할 때면 무릎을 치면서 세상을 다시 만난 듯 웃는다.
한국에서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지내던 남자 분들이, 캐나다에 살면서 이런 경험이 어디 나 하나뿐 이겠는가?
젊은 시절이었기에 엄청난 나의 첫 경험이기에 지금은 신이 나고 행복했던 시절로 살아나고 있음을 !
그대들은 아시는가요.
79장 집이야기
우리는 집수리가 어느 정도 끝이 나자 팔기 위하여 복덕방을 불렀다.
나이가 지긋한 복덕방 신사는 금색의 차를 타고 신이 나서 현관문을 두들겼다.
아내는 차를 끓여 왔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비싼 집에 가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 집이 1베드룸에서 2 베드룸이 되었고,
이젠 수리를 많이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 지하실까지 내려가 보았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아내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이런 집이라면 땅값 밖에 받을 수가 없는데요."
우리는 귀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더 심하게 가슴을 빗자루로 싹 싹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런 집은 성냥이 있으면 다 태우고 새로 지어야지요!"
아내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얼굴이 노랗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고생한 것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더하는지도 모르고 앉아있었다.
아니 그가 빨리 이방에서 나가주었으면 했다. 우리는 그가 간 뒤에 문을 닫고 기운 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말이면 다해? 얼마나 힘들이고 돈을 쳐 들이고 고친 집인데?
별 꼴 다 보겠네."아내는 화가 나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날 당했던 실망! 그것은 부유한 사람은 전연 상상도 못 하리라.
가난한 사람이 돈을 벌겠다고 집을 고치며 일 년을 먼지 속에 이리저리 짐을 옮기며 살았고, 지독한 노동이었다.
그러나 불태우라는 그 말 한마다가 두고두고 우리를 쓰라리게 하였다.
그 말은 앞날의 희망을 지우고 한동안 우리의 마음속에서 행복을 앗아갔다.
우리는 다시 생각하였다.
"그 사람은 어서 빨리 싸게 내놓고 팔아치우려는 속심일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복덕방은 솔직하게 생각 없이 그 말을 우리에게 뱉었을 뿐이다.
우리는 겨우 우리가 들인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 집을 팔아버렸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불경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집을 팔고 새집을 살 수가 없어 다시 오래된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경치가 끝내주는 캐피털 힐 언덕 위에 있었다.
우리는 그 경치에 반하여 그 집을 사게 된 것이다. 이번에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고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 작정이었다.
1979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이 왔다. 나는 이층 골방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조금만 더 살아주셨으면 좋은 집에서 같이 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기다려 주시지 않으셨다.
내 가슴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어쩌다 늦으면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느라 전신주를 안고 뱅 뱅 도는 날도 있었다.
손잡고 창경원 벚꽃 놀이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어머니. 조금만 자리 잡히면 같이 살자고 아내와 약속하였는데......,
아내도 어머니가 이민 온 지 3년 만에 돌아가셨다.
또다시 시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되어 몹시 슬퍼하였다.
생명은 그렇게 사라져 간다. 가슴치고 후회하는 날이 돌아와도 무심한 세월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젠 나의 불효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고 아내도 엉엉 따러 울었다.
이런 이별의 슬픔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어제처럼 다시 빛바랜 하늘아래서 연속된다.
다시 숨 쉬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식도 바르게 키워야 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못다 한 삶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다.
특히 우리같이 뿌리를 못 내린 이민자들에겐 일 속으로 일 속으로.
나는 첫 번째 집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두 번째 낡은 집은 오래 가지고 있었다.
가게를 하면서 주말이면 잠간 시간을 내어 달려가서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이곳 사람들과 주중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망치로 힘껏 두들기며 풀고 있었을 것이다.
고친 뒤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발전한다는 그 만족감 이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집을 고치는 운동으로 내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게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2번째 집은 호경기를 만나, 그리고 집을 잘 수리하여서 거의 몇 배나 되는 좋은 가격으로 파는 데 성공하였다.
캐나다 삶의 큰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귀중한 노동의 경험이,
무일푼으로 시작한 이민 생활에서 3번째 주유소가 달린 빌딩을 짓는데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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