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장 국회 부의장 윤제술 선생과의 만남
캐나다로 떠나기 전에 장모님은 나와 아내를 데리고 갈 데가 있다고 하였다.
외국으로 떠나기 전 우리가 인사도 드려야 하고 또 그분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분은 장모님의 큰 오빠 윤제술 선생 이였다.
바쁘신 중에도 하얀 한복에 날아갈 듯 가벼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며 반겨주셨다.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며 서재로 보이는 방안엔 벽으로 책들이 가득한 책장이 하나 있었고,
붓글씨를 쓰는 탁자하나가 방 가운데 놓여있었다.
그리고 가득한 것은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이었다.
방구석에선 난롯불이 하나 붉게 타고 있었다.
국회부의장의 집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하여 방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래서인지 그 속에 숨겨져 있었던 깨끗한 선비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은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순수한 모습이 그 몸속에 배어 있었다.
젊은이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진심으로 우려하고 계시던 분 이 시였기에,
우리를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꼭 돌아오게나! 꼭 돌아와서 그곳에서 배운 것을 꼭 한국을 위해서 써주게나!
앞으로 한국은 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운 젊은이들이 돌아와서 일으켜 주어야 할 것이네.
이것이 내가 떠나는 자들에게 부탁하는 말이네."
그분은 외국에 나가는 누구에게나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글씨에 조예가 높은 분. 힘차게 휘날려 한문으로 적어 우리에게 준 글은
"작은 연못의 물고기는 바다를 그리워하나, 떠도는 들새는 결국은 집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당장은 좁은 땅을 떠나고 싶으나 앞으로 꼭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글이었을 것이다.
바람에 날려갈 듯 약한 몸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책을 막기 위하여,
그러나 덕분에 정권의 매도 많이 맞았지만, 국회 의사당 앞에서 외로운 단식투쟁을 하던 분.
나는 후에 지면에서 그분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윤제술 선생,
내가 미군철수를 막기 위해 밀사의 자격으로 몰래 출국할 때,
애가 단 나머지 연로한 몸으로 몰래 혼자 공항까지 나와서 눈물 글썽이며 배웅해주던 맑은 애국심의 소유자,
그 어른은 자연인으로서나 정치인으로서 나에게는 진정한 사표(師表)였다.
그것은 서로 반대당을 지내며 부딪쳤으나 같은 시대에 국회 부의장을 같이 지낸 장 경순 선생의 말이었다.
외국생활에서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살아계시게 한 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우리의 인연을 얼마나 기뻐해주셨을까?
청렴하고 유창한 연설로 이름난 윤제술 씨는 자기의 고향에서 4번의 당선 후 일가 친척들과 도와준 사람들을 하나도 출세의 길에 올리지 않았다. 그 불평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자 그는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서대문을 선거지역구로 선택하였다.
학자와 선비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윤제술 씨가 오자 선거위원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서울 서대문에서 국회의원으로 나와 2선을 아버지가 열심히 도왔고 6번의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내신 분이다.
아버지는 그분의 높은 교육과 참신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나는 내가 이 군상씨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싶었지만, 그떼 기분에 그러지 못하였다.
누구나 외국에 살면 애국심은 더 강해진다고 한다.
조국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남아있는 내 나라의 사랑은 더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겨우 직업을 얻어 밴쿠버에 있는 유비시대학 원자력연구소 TRIUMF에서 조수로 일할 때였다.
나는 교수님에게 사정하였다. 한국젊은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TRIUMF 연구소의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복사해 줄 것을 교수님 에게 부탁하였다.
원자력의 연구와 원자력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시도하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영사관을 통해서 이곳 B C I T 학교에서 상영된 후 그 태잎은
한국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전달되었다. 몇 달 후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곳에서 교수들을 위하여 정말 열심히 5년간을 일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였을 때 교수들은 매우 섭섭하다고 하였다.
학장의 집에서 여러 교수 사모님들이 음식을 해왔고 나와 아내를 위하여 특별한 송별파티를 해주었다.
나의 캐나다 생활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다.
72장 캐나다의 이민시대(1973년)
할아버지시대부터 1900 년대부터 70년간의 우리가 경험한 한국시대가 지나갑니다.
이제 자유와 부를 찾아서 온 50년간의 캐나다 생활이 시작됩니다.
나는 캐나다에 오고 가면서 3년을 소비하였다.
그렇게라도 월급을 받고 정착하는데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1972년에 결혼 후 밴쿠버에 도착한 나는 오자마자 아내를 입국 수속하였고,
아내는 밴쿠버 공항에 6개월 만에 도착하였다.
노총각과 노처녀로 서로 구제해주었다는 우리들의 결혼생활 아내는 화려한 외국생활을 꿈꾸고 상경하였으나
바닥의 현실에 무척 실망하였다. 사실상 혼란 속에 빠진 아내는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싼 비행기 값이 없어 머무르게 되었다.
어떤 환경속이라도 당하면 사람들은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는 고집과 아집으로 서로를 원망하며 몇 번의 실연을 겪었으나 아내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서로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우리의 젊음은 가난을 그대로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가난하였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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