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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61장 그 시대의 젊은이들(1960년)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2. 17.

 61장 그 시대의 젊은이들 (1960년)

 

  젊은이들 사이에 미국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군들이 가져온 물자가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그 마력에 이끌려 미제라면 무엇이든 선호되었고 야미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미군기지 피엑스에서 나온 물건들이 장사꾼  손에 넘어갔고 이런 물건들이 쉬쉬하며 돈을 벌었다.

또 한편에서는 미제품 반대 운동도 벌어져 아까운 물건들을 한강 백사장에서 불태우는 것도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래도 여자들은 화장품과 스타킹, 비싼 옷들을 사 입고 자랑스럽게 활보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품이 교회를 통하여 들어왔다.

새로운 물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람들은 미국을 별천지의 나라로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시대의 희생양으로 이름 붙여진  양공주, 양색시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나라를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전쟁 혼혈 아들도 미국으로 입양되고 있었다.

권력 있고 부유한 집에는 자녀들을 미국으로 유학시키는 길을 찾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의사와 간호사가 부족하여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들였다. 

독일에서도 간호원과 보조 간호원들을 요청하고 있었다. 독일광부로 갈 수 있는 길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미국은 월남전쟁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전쟁 후 먹을 것이 부족한 우리는 전쟁에서라도 돈을 벌기 위하여,

미국이 요구하는 월남파병을 박정희 대통령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처음엔 지원자들이 출발하였다.

백마부대는 그런대로 부상 없이 돌아왔으나 전쟁이 치열해지자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원수가 모자라자 의무적으로 떠나게 되었다.

월남에 돈을 벌려는 민간인들도 수없이 떠나갔다.

월남으로 떠난 남편들이 월남에서 붙여준 돈이 문제가 되었다.

갑자기 부유해진 일부의 아내들이 제비족에 잡히어 춤바람에 가정이 파탄된 소식이 주간지마다 실렸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업을 찾아  독일 광부로 떠난 젊은이들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이 탄광지하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저 먹고살 수 있는 길이라면  한국젊은이들은 닥치는 대로 흡수하였다.

고기를 잡는 원양어선을 타고 젊은이들이  먼 사모아섬까지 배 멀미를 하며 몇 달씩 먼 바다로 떠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싼 임금을 찾아 미국회사가 영등포 부근에 세미코를 세웠다.

그곳에선 많은 여자 종업원들 고용되어  트란지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계 속에서 24시간을 교대하면서 처음으로 혹독한 일을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떠나려는 열풍, 이 열풍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더 거세어졌다.

 

 

 62장  내 인생의 재 시작  약학대학

 

  1960년대 시대적으로 인기 있는 학과는  의대와 약대였다.

약대생들이 약국을 차리고 돈을 잘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사가 마이싱과 해열제 소화제 신경 안정제를 의사 처방 없이 마음대로 조제하여 팔 수 있었기에,

약학과는 2차 대학이라도 들어가기가 어려워졌다.

약대생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 자격증을 빌려주고 제대로 출근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관리약사라는 특이한 용어도 생겨났다.

나는 그 시절에 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나선 것이다.

전부터 외교관을 꿈꾸었으나,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누워 계서서  경제적인 힘을 잃고 있었다.

돈으로 해결하는 세상에 나는 외교관이 되기 위해 유명인사와 접촉할 길이 없었다.

배경이 좋은 친구들은 출세를 하고 있었고 나의 꿈은 현실 속에서 날개를 접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왜 아버지가  의대를 보내려고 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 젊고 늦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외교관이 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내 힘으로 다시 시작하자!

나는 외교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남산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차라리 경제적으로 자립 할 수 있는 약사가 되자! 나는 외대 졸업식 날,

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성균관대학 약대시험을 보러 갔다.

약대는 이과를 졸업해야 했는데 나는 어려운 영어과를 나왔고, 고등학교 수학성적을 보더니 그대로 합격시켰다.

 내가 집에 돌아와,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약학과의 합격을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의 눈에서 물기가 흘러내리며 기뻐하시었다. 아버지는 내게 등록금을 주셨고 이제는 되었다.

너는 잘 해낼 것이라고 용기를 주셨다. 나는 1964년 일 학년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어린 학생들과 몇 명의 학사입학생 속에서 나는 밤 낯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세월은 흘러  4년간 배운 것을  모조리 치르는 어려운 국가시험이 눈앞에 도착하였다.

몇 달간 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한 끝에 약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68년 나는 성균관대학 약대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4년간의 외국어대학과 4년간의 약학대학 8년이란 긴 대학생활에 얻게 된 교사자격증과 약사 자격증,

무엇이 더 가치가 있었을까?

 분명히도 돈을 벌 수 있는 약사자격증이었다.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이자, 누워계신 아버지의 미소가 내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63장 세일즈맨

 

 세일즈맨의 일생

세일즈맨은 큰돈은 벌 수 가없다. 그러나 세일즈맨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상과 마주할 수 가있다.

그들은 사람들과 거침없이 이야기하며 자유스럽게 살 수가 있다.

유형의 재산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을 쌓는 것이다.

그런 힘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돈을 주고 살 수가 없다.

 졸업 후 나는 제삼화학 에 약 세일즈맨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공을 위하여 세일즈맨으로 시작하여 인생을 처음부터 배우고 싶었다.

제삼화학 사장은 합격자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나는 세일즈맨을 뽑을 때 단 한 가지만 조사하였습니다. 구두끈을 어떻게 매어졌는지 만을 검토 하였습니다.

이곳에 입사된 여러분은 구두끈을 제대로 잘  맨 사람들입니다."라고

우리는 사장의 말에 놀라서 서로의 얼굴과 신발을 바라보았다.

사장은 말하였다.

"단정하게 신발 끈을 맨 여러분들.

나는 그 모습으로 여러분들이 우리 회사를 위해서 충실하게 일을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인사말은 간단하고 명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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