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장 이별
그렇다.
내가 선택한 처음 직업은 구두끈을 잘 매고 하루 종일 약을 설명하기 위하여 뛰어다니는 직업이었다.
주로 만나는 사람은 의사, 취미와 성격 생일과 결혼한 날 까지도 미리 파악하여 접근해야만 했다.
세일즈맨으로 교육받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회생활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세일즈 맨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데는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배우지 못했던 술!
내 몸속에서는 술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루는 이 술 때문에 나는 골목에 그대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응급실로 죽음의 입구에 까지 갔다 왔다.
"사람이 살려고 돈을 버는 것인데 술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일즈맨을 접고 광일제약 약사로 취직하였다,
그때 한참 가로수가 죽어가든 때 단졸 크레졸을 만들었고 메논 정을 만들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6번쯤 월급을 탓을 때였다. 내가 졸업하면서 신청하여 두었던 캐나다에서 편지가 왔다.
밴쿠버에 있는 런던 약국에서 한 달에 300불 지불한다는 고용 계약서였다.
그 당시에 300불은 한국에서는 보통월급의 10배 쯤되는 큰돈이었다.
캐나다영사관은 홍콩에만 있었고, 홍콩에서 온 캐나다 사람이 조선호텔에 머물면서 인터뷰를 하였다.
나는 신체검사와 준비를 마치면 밴쿠버 런던 약국으로 가겠다고 서명하였다.
영문학과 약학을 졸업한 나를 대 환영하였지만 막상 날자가 오자 나는 떠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견디실까? 가여운 아버지의 모습에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미루고 미루고 마지막 통첩장을 받게 되었다.
그때 형은 결혼을 하였고 한의사를 개업하고 있었는데 술을 좋아하였다.
술값이 모자라면 집에 찾아와 아버지 금고를 열면서 말하였다.
"언젠가는 장남인 제게 주실 돈이 아니십니까?
제가 미리 좀 쓴다고 다를 게 있습니까?"
형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를 점점 화나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누워계시는 이불 옆에 앉자 아버지는 한 손을 이불속에서 꺼내어 내 손을 잡고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나는 괜찮으니 가고 싶은 캐나다로 떠나거라. 그동안 두 번이나 미뤘다면서 그럴 것 없다.
나 때문에 묶여 있는 것이 괴로우니 곧 떠나도록 하여라."
아버지는 그동안 신체검사며 내가 수속을 어렵게 한 것도 알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더 미룰 수가 없는 것도 어머니가 말씀하셨는지 알고 계셨다.
"나는 괜찮다. 네 어미가 잘 돌봐주지 않느냐. 그리고 사람을 오라고 해서 부탁하면 될 일이다.
희망이 있는 나라로 가서 자유롭게 잘 살거라."
나는 생각하였다. 어쩌면 내가 떠나는 것이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할지 모른다.
나는 캐나다에 편지를 보내 마지막으로 사정해 보았지만,
더 이상 가는 날을 연기할 수 없다는 통지서를 받고 가기로 결심하였다.
나중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처럼 후회할지 모른다.
나는 결심하였다.
"아버지 그럼 떠나겠습니다."제가 자리 잡고 첫 휴가를 얻으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가는 웃음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에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캐나다 비행기에 올랐다.1970년이 저물고 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속으로 새들이 속속 나르는 10월이었다.
65장 출국과 귀국
캐나다 공항
낯설고 여린 비가 추근추근 내리는 공항 밴쿠버는 온통 미지근한 회색 하늘을 이고 조용한 풍경화였다.
작은 검정 가방 속엔 세면도구와 옷 몇 가지 장갑과 돈 150불과 수면제 세코날 50알이 들어있었다.
겁이 많았던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캐나다 밴쿠버 에 입항하면서 살용기와 죽을 용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내 자존심이 정말 허락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나에게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코날 50알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이민국에 신청을 하고 택시로 무조건 시내로 들어갔다.
발품을 팔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싼 집으로 보이는 허술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튿날은 일 찍 일어나 내가 취직하기로 한 런던 약국을 어렵게 찾아갔다.
"한없이 당신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미 다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너무 늦게 나타났으니까, 길가로 나와서 전화부터 찾았다.
전화박스 속으로 들어가서 번호부를 보고전화를 돌렸다.
한국교회를 찾게 된 나는 정말 감동이었다.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한국 젊은이들이 머무는 동네에 가격이 싼 방을 일본젊은이와 같이 쓰게 되었다.
저녁이면 걸어서 한국청년이 머무는 집을 찾아갔다.
그들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밤이면 몇 명의 청년들이 모여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저녁이면 낮에 직업 찾아다니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고 있었다.
직업을 구한 청년은 신바람이 나서 직업을 구한 스토리를 일어서서 흥미 진지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때 보고 있던 청년하나가
"그럼 그것을 다 영어로 해 봐 나도 좀 배우게"
신바람이 나던 청년이 말을 못 하고 멈추었다.
"그럼, 그렇지 손짓발짓으로 했겠지! 하하하 “이들과 어울려 박수를 치면서 웃기도 했다.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초기이민자들은 서로를 돕고 안심하고 있었다.
날마다 거리를 헤매어도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몇 주가 지나갔다.
가져온 돈이 바닥이 날 때가 되자 마음이 철렁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돈 떨어지면 집에도 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바로 그날이었다.
"미스터리 돈 필요하지 않습니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맨파워 카운슬러로 만났던 이민국에서 일하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아니 제가 돈이 없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미스터리 우리 사무실로 나와서 돈을 타가세요."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캐럴에게서 하루 두 번 버스비와 방세와 하루 음식 비를 한 달에 두 번씩 가서 받을 수가 있었다.
뜻밖에도 그 당시는 캐나다정부는 불러들인 자들을 그렇게 돌봐주며 책임을 지고 있었다.
카운슬러 캐럴은 몇 군데의 직업을 소개해 주었지만 나는 가는 곳마다 학력이 너무 많아서 거절당하였다.
친척들의 소개로 온 친구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고, 학력을 낮추고 밤에 나가 청소 일을 하였다.
"이렇게 직업 구하기가 힘들다면 이곳에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서울에서 약사로 대접받으며 잘 살 수가 있는데, 마음이 복잡해지고 점점 집 생각이 날 즈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니 올 수 없느냐는 소식이 왔다.
나는 직업에 대한 대한 실망도 컸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나를 믿고 희망을 주는 아버지, 나는 자리를 잡는 데로 휴가를 맞고 아버지를 찾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기다리다간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나는 캐럴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병환을 설명하고 비행기 차비를 빌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캐럴은 비행기 값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행기 값을 타 가지고 가면 법적으로 캐나다에 다시 못 들어올 것이니 다른 방법을 구해보라고 조언하였다.
나는 일본에 있는 미국 친구 마이클에게 연락하였다.
마이클이 한국에 왔을 때 보사부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약사를 찾고 있었다.
나는 마이클이 연구하는 약품을 알려주고 모든 번역을 해주었었다.
마이클이 내게 지불할 돈을 남았다며 일본에서 금방 돈을 붙여왔다.
나는 마이클의 도움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비행기 속에서 소심한 성격으로 아버지에게만 의지하고 살았던 나,
아버지의 병환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과 큰 설음인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김포공항에 내렸다. 서울의 한 모퉁이 땅을 딛자 왠지 설움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나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쁨.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공항 문을 빠르게 나가고 있었다.
66장 승리자의 길
일 년 만에 다시 서울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대로 내 손으로 아버지의 두 눈을 감겨드렸다.
아버지는 평화로운 곳 북한산이 멀리 보이는 곳, 풍수지리설에 의해 미리 준비해 둔 곳 원당 넓은 산자락에 묻히셨다.
언제나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며 무릉도원을 만드시는 것을 꿈으로 여기셨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같이 심었던 농원 밤나무 줄줄이 서있고 과일나무 향기가 퍼지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지난날 돼지를 키우는 중에도 아버지는 공병대에 부탁하여 연못을 크게 파셨던 곳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개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그곳에 진흙과 왕겨를 깔고 개흙을 깔고 그 속에 미꾸라지를 풀어놓고 나와 같이 기뻐하셨던 아버지
“보아라! 왕겨가 썩으면서 벌레들이 자라나고 그 속에서 미꾸라지가 잘 크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생명을 연결시킨다.”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그대로 들리는 듯하였다.
아버지가 밤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들을 심어 과일 밭을 만들고 무척이나 기뻐하셨던 곳,
꽃과 나무가 흐드러지고 무릉도원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아버지는 병이 났고 이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내가 땅 하나를 팔아서 병원으로 가자고 하여도, 땅은 팔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셨다.
나는 알고 있었다. 왜 쉽게 그 땅을 팔 수 없는 지를?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것은 쉽게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병든 환자들과 보낸 그 긴 시간들, 아버지가 몸을 녹이며 만든 돈 한푼 한 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는 꼬깃 꼬깃한 돈이 있으면 잘 펴야 했고 찢어진 돈은 풀칠을 해서 금고에 넣었다.
이런 정성으로 은행에 돈은 저축되었고 땅과 밭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 재산을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자신을 위해서 그러셨을까? 자손을 위해서였을까?
나는 인간의 속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땅을 찾으러 다시 돌아 올 수가 없다.
그런데도 땅을 팔지 못하게 하고 다시 올 것처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땅이란 진정 소유할 수도 없다. 땅은 언제나 땅 자신의 것이다.
잠깐 사는 동안 그 땅에 심고 지키는 권리만 가지는 것이다.
그 관리자가 되기 위하여 인간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과시하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이 땅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써서 벌어 논 재산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형제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니,
우리는 이북에서 내려올 때부터 얼마나 많은 고생을 같이 견디고 잘 살아왔는가?
어렸을 땐 둘도 없는 친구였고 형이고 아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 상황이 변해버렸다. 형과 아우가 재산 분배로 불처럼 싸우고 있었다.
아우는 현대식으로 진 돈암동 큰 집과 결혼으로 형몫은 다 지불되었다고 소리를 치고,
형은 나는 장남이다, 아직도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2가 장남인 내 것이라고 우겼다.
나는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느꼈다. 끊임없는 재산싸움
술에 취해 사는 형과 자식이 많아 안심할 수 없는 형수 ,
온갖 무술을 다 익히고 있는 몸짱 동생사이의 언쟁은 계속되었기에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싶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싸움에서 승리는 언제나 강한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나는 성격상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버지는 땅을 내 이름으로 해 놓으셨을 것이라는 것을!
지금 나는 나의 이 부끄러운 집안 이야기를
왜 나의 자식들에게 거듭 들려주어야하는가
진정한 승리란 무엇인가? 진정한 승리는 부모의 부유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려받은 부유는 쉽게 사라 질 수 있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까지 잃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 왔다.
나의 아이들아
무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유를 창조하라
거듭 정신적 노동과 신체적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성공이
행복이
유를 창조하는 그 과정 속에 건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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