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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59장 족보 이야기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2. 16.

 59장 족보이야기

 

  특히 고향을 떠난 이민자에겐 후세에게 자신의 족보를 알려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한국이란  땅에서 시작되어 멀고 먼 캐나다까지  어떻게 흘러오게 되었는지?

아이들에게 조상의 뿌리를 알려주고  미래에 희망을 주는 그런 것이기에, 그족보의 번역판이 완성되어

캐나다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설레는 심정으로 족보를 가슴에 안았다.

 족보!

서울 서대문구 에 살던 어느 날

“이 선생님! 선생님이 족보를 이북에서 가지고 내려 오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물어물어 찾아왔습니다.

저도 완창대군 후손입니다.”

아버지를 찾아온사람이있었다.

“젊은 사람 반갑네. 어서 들어오시오.”

아버지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완창대군의 후손이라는 말에 손을 붙잡고 반가워하였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서울에 와서 살게 되었는가?”

“ 저는 혼자서 6 25 때 내려왔습니다.

인천에서 목재소를 하다가 지금은 대한 극장 앞 뒷골목에 제재소를 하고 있고 있습니다.”

“  아 그래요,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요. 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이 크게 번졌다.

  "젊은이가  사업가가 되었으니 참 대단하오. ”아버지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아닙니다.”젊은이는 겸손하게 손을 모아 쥐며

"선생님이 아주 좋아 보이 십니다.”

“아 그래 보여요?” 아버지도 행복하게 웃으셨다.

“ 찾아뵙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이 가져오신 족보를 좀 빌려 주실 수가 있으신지요?

복사를 하고 꼭 가져오겠습니다.”

“글쎄요" 아버지는 심각해졌다.

"내 족보를 그렇게 내달라고 하니  허허허......, 내게는  무엇보다도 귀한 것을! 

섭섭하시겠지만 내 마음을 헤아려 주게나. 내가 빌려주고 받을 것이면  그것을 돈 대신 가슴에 명주로 감고 내려왔겠나?"

그날 아버지는 젊은이에게 족보를 보여주지도 않으셨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갔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 젊은이는 나이들은 완창대군의 사람들을 동반하고 다시 찾아왔고 무릎을 꿇고 사정하였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차를 대접하였다.  이번에도 족보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족보가  아버지에겐 무엇인지를 그때야 깨달았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이 족보는 내가  돈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섭섭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 방에 와서 보고 적어 가세요......,

그러나, 족보는 내가 밖으로 돌릴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얼마 후에  또다시 그 젊은이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나이가 많은 친척아저씨를 수소문해서 데리고 왔다. 아버지는 일호아저씨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는 일호 아저씨와 젊은이를 같이 보내어 모든 것을 복사한 후에 지켜 서서 가져오게 하였다.

아버지는 그 젊은이의 적극적이고 끈질긴 집념을 칭찬하셨다. 

내가 캐나다에서 지니게 된 완창대군의 족보 번역판은, 아버지의 족보로부터  그 젊은이의 열성으로 새로 복사된 것이다.

이씨조선 때 족보의 시작은 예종 대왕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숙종 때까지 보강하므로 계속 이루어졌다.

여기에 대제학 김 석위씨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올 때 아버지가 가슴에 명주로 감고 내려오셨던 족보.

족보는 아버지가 영천에서 한의사를 하실 때에도 금고 안에  집문서와 같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이 족보를 얻게 되었는지 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족보를 자기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던 옛사람임을 알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흐른다. 그리고 인생의 역사는 족보로 흘러 내려온다.

그것은 각 산하에 강물이 흐르듯  족보는 인생의 물결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족보를 알고 산다는 것은 희망을 불러온다.

족보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해서 도전할 힘을 주는 것이다. 

특히 고향을 떠난 이민자에겐  족보는 중요한 것이다

 다문족의 국가가 합쳐버린 캐나다.

족보가 보관되어있는 클로버데일 도서관을 가본다.

조상들이 심어놓은  족보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열심히 두들기고 있다. 

어느 날 몬트리올 맥길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제가 읽을 수 없는 족보지만 보내주세요.

 

아들은 어려운 한문족보를 맥길대학의 중국교수에게 부탁하여 자기의 원조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 두꺼운 족보 책을 다 복사하여아들에게 부쳐주던 날, 왠지 병석에 누워계셨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오래 만에  효도나 한 것처럼 마음이 가볍고  가슴에 따뜻한 물기가 흐르며 행복하였다.

 

  60장 아버지의 세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나는 시골에서 돼지 키우는 것을  팽개친 체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심각한 상태였다 . 아버지는 몸이 약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무리하게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첫 번째 중풍은 내가 아버지를 도우려 마른풀 약을 썰고 있을 때였다.

고려대학 상과  다니는 학생이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찾아왔다.

아버지는 물건을 팔려는 그 청년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환자들도 다 못 보는 상황이라고 전하자, 청년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나섰다.

환자들과 청년의 말대꾸로 밖이 시끄러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혈압이 높아지신 아버지가 그대로 문을 열고 나오셨다.

"너는 어른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안 들리는데요" 하고 오히려 소리를 높이는  청년의 건방진 태도에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용산 에 대나무 파는 집을 찾았다.

이 상황에서 대나무는 특별한 약이었다. 광주 쪽에서 올라오는 신선한 대나무를 일일이 잘랐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앞마당에서  독 속에 대나무를  깔고 밑에는 공간을 만들었다.

대나무를 도끼로 잘게 잘라서 그 독에다 꽉 채워 진이 잘 흘러내리게 세워 넣었다.

꼭대기를 광목이나 삼으로 덮었다. 뚜껑을 덮고  가장자리를 밀가루로 공기가 잘 새지 않게  떡 칠을 하였다.

불 때는 데는 장작을 쌓아놓고 장작 밑에는 돌을 안전하게 받쳐 놓는다.

그 위에 독을 놓고 안정시킨 뒤 왕겨를 옆으로 앞으로 독 위까지 가마니로 덮어서 밑에서 불을 붙이였다.

장작이 타면서 왕겨에 불이 붙어 밤새도록 서서히 탔다. 다음날 열어보니 극소량의 노르스름한 물이 몇 컵이 나왔다.

그것을 병에다 잘 넣고 티스푼으로 아침저녁으로 먹어 신경이 살아나게 하는 특효약이 되었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활동하시고 다 낳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두 번째로 쓰러지셔서 돼지를 키우고 있는 나를 부르신 것이다.

사태는 처음보다 더 심각하였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오래도록 일한 할아버지에게 환자를 보도록 맡기셨다.

나는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이젠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자고 사정하였다.

아버지는 자기 병은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극구 반대하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밤중에 나를 깨우셨다.

 "많이 아프세요"하고 물어보자

"저기  위 에서 4번째 서랍에 들어있는 약을 가져 오너라"

내가 서랍을 열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약은 안 된다고 울음 섞인 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었다. "내가 잘 아는 병이다 나는 이제 끝났다. 

재산을 탕진하고 싶지도 않고 식구까지 못할 짓을 시키고 싶지 않다.

어서 약을 가져오너라." 서랍에서 비산이 들어있는 독약을 치우는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누워있는 아버지가 왜소하고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누어서 세월을 보냈다.

나는 다시 학교를 가기 위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야만 했다. 

자식들을 위하여  살기 위하여  그리도  밤을 새우며 노력하신 아버지

아버지의 세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인가?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나는 아버지의 희생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보면  어린애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신다. 나 자신 효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데......,

먼지 나는 시골길을 걸어 나오면서 겨울도 아닌데 가슴이 답답하고 시렸다.

나의 앞날을 예고하듯.......,

그러나 아버지와 약을 썰며 약봉지를 같이 싸며 돈을 세며  아버지의 조반을 위하여 아침 생선을 사러 다니고 같이 잠을 자며 아버지와 지낸 시간들이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나처럼  행복의 날들로 기억하실까?

나에겐 그때의 기억이 가장 행복한 시절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