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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67장 아버지의 유언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2. 19.

67장 아버지의 유언

 

 아버지의 임종을 치르고 내가 다시 떠나려고 하자

동생과 격 한 싸움에 지친 형은  나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집 근처에 있는 다방에 마주 앉았다.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형은 한의사는 거의 접다 시피하고  술로 건강을 잃고 있었다.

"선평아! 나는  술과 안정제 없이는 이젠 살 수가 없다. 네가 집안 일을 맡아서 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아버지가 재산을 다 네 이름으로 해 놓았다고  괴롭혀서 미안하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술만 먹는 자식에게 어떤 아버지가 재산을 맡기겠느냐. 형은 괴로움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변호사를 불러 재산을 정리한일, 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어도 모르는 일이 있었다.

재산이 전부 내 앞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어머니와 형으로 부터 알았다.

이일로 형과 형수는 내가 약대공부 중에도 나를 그렇게 괴롭혔었나?

견디다 못한 나는 형의 목을 잡았고 형수는 노발대발하였다.

형수는 내가 욕심이 많아서 대학교를 4년간이나 돈을 허비하고 다닌다고 시비를 걸고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형과의 몸싸움에서 형보다도 나 자신의 행동에 좌절하였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형과 다투면서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길로 마음을 정리하였다. 나는 낯선 얼굴을 하고 나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가라 입고 세코날 수면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흰 옷에 하얀 수염을 기르고 단장을 짚은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너는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니다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내가 혼수상태에서 7 일 만에 깨어나는 날이었다.

형과 어머니가 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형이 그 일로 괴로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 그때 일은 마음에 두지 마!

나는 아버지가 혼자서 하신 일, 나는 전혀 알지 못했어.

그 알지도 못하는 일을 내가 아버지에게 알랑거려서 했다고?

형이 말할 때 억울해서 나 잠간 제정신을 잃었었나 봐   나 이렇게 살아 있잖아.

이젠 다시는 형 걱정 시키지 않을게.

내가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것도 형 때문이 아니야.

나 이젠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

형! 나는 외국에 나가고 싶어 가는 거야.

형! 약해지지 마!

내가 다음에 올 때 건강 해져서 만나 형!"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어. 아버지는 무릉도원을 그대로 지켜달라고 하셨어.

그리고 그곳에 사는 배다른 두 동생도 돌봐 달라고 하셨어.

형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지 형도 잘 알잖아!

언젠가는 그 땅이 우리 자손을 다 보살펴 줄 것이니 지켜달라고 했어.

형! 그게 아버지의 뜻이야.

내가 떠나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해!"

"동생에겐 어머니를 잘 모신다면 내 이름으로  된 집은 동생이 가져도 된다고 했어."

나의 가슴은 어느새  패배자가 되는  슬픔이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내 조국을.......

내 자유와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떠나야만 했다.

두 번째 만나는 밴쿠버공항의 불빛이 이젠 낮 설지가 않았다.

처음 알지도 못하는 캐나다라는 땅으로  떠날 때 나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나 가는 막막한 마음으로 세코날 50알과 돈 150불을 준비하였었다. 죽을 용기와 살용기가 있었다.

이번엔 세코날 50알은 챙기지 않았다.

두 번째 떠날 땐 나는 열심히 살 용기만을 가지고 떠난 것이다.

 

68결혼과 행복

 

오늘날은 결혼이 깨어지지 않고 평탄한 결혼생활을 하여도 행복한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한 시인은 사람이 오는 것은 과거와 현제와 미래를 가져오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오기에 서로의 이해가 부족할 때 불행은 시작된다.

한평생을 같이 살 사람과의 관계란 시작부터 순수해야 한다.

개인과 부모의 욕심과 고집으로 성사된 결혼이 과거나 현제에도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1900년초기에는 이광수의 작품 무정이나 유정 같은 소설이 나오면서 한국에도 새로운 결혼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부모가 정해준 결혼으로 불행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전처를 버리고 대화가 통하는 새로운 처를 맞이하기에

불행한 전처들이 자식들만 안고 살았다.

그 후로는 정비석이 쓴 자유부인이란 소설이 나왔고, 신문에 연재되어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예고하고 있었다.

 

형은 다방에서 쌍화차를 마시며 나에게 자신의 잘못된 결혼을 한탄하였다.

아버지는 친구로부터 이조시대에 정승을 지낸 집 자손의 의 딸을 소개받았다.

대학을 갖나 온 형에게 맞선을 보라고 주선하였다.

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전라도 지방으로 그 집을 찾아 내려갔다.

형은 현대인이기에 그저 만나보고 교제를 해보고 결혼은 그다음 순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이 혼자서 지방으로 내려가 여자 부모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은 좋았다.

부모는 형에게 거대한 밥상과 술상을 차려주었고 술잔이오고갔다.

술을 못하는 형은 몇 잔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쓰러졌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가 술 취한 방에 딸이 들어가 밤을 보내게 한 것이다.

형은 깨어보니 여자가 바로 옆에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 한 번의 실수로 형은 정신적으로 오고 갈대가 없었다.

그래서 묶여진 결혼식, 그 뒤로 형은 술친구들과 어울리고 다른 여자를 찾아다녔다.

결국 이 결혼은 부모의 욕심으로 딸의 운명까지 불행하게 하였다.

형수도 우리 형이 아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결혼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41세 된 남편을 잃고 결국 불행한 형수는 아이들까지 혼자 책임을 지고 험한 인생길을 걷게 되었다.

 

형이 자신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나에게 들려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형은 마음 약한 나의 미래와 나의 결혼을 걱정하였을 것이다.

결혼은 당사자들의 이해와 만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그 시대에 이런 일로 불행한 사람을 충분히 보았다.

그러나 현대는 자신들의 자율적인 만남과 결혼에도 더 많은 이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과 영혼이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이다.

서로를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진실한 우정과 사랑이 같이 숨 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9장 형과 양주 한병

 

 다시 아름다운 도시 밴쿠버에 도착하였다.

나무가 울창한 스텐리 공원을 돌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나무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이 거대한 숲을 구경하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말씀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나셨다.

나는 주로  걸어 다니거나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을 혼자 걸어 다니면서,

내가 왜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형제간의 불화도 한몫이었다 .

그러나 서울엔 지금과같은 자유가없었다.

그 당시엔 서로 간첩으로 신고하는 세상이었다

한국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잘 살기 위해 한국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평화로운 도시 깨끗한 공기, 살만한 곳이었지만 직업이 필요하였다. 그때  밴쿠버엔 누가 와 있었는가?

서울대학의 지질학과 졸업생들과 광산과를  졸업한 수재들이 이민을 받아주었기에  와 있었다.

그들은 곧 광산 노동직업을 찾아 북쪽으로 떠났다. 몇 명의 간호원들은 그런대로 깃발을 날리고 있었고,

젊은 부부가 몇 있었다. 월남으로 해서 들어온 젊은이들이 서너 명이 있었다.

유학생이 몇 명, 약사가 서너 명 그리고 독일에 광부로 갔던 용감한 청년들이  캐나다 이민 길을 수소문해서 들어왔다.

반병섭 목사님이 있었고, 그러나 밴쿠버 에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가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수자였다.

부부가 같이 온 사람들은 직업이 먼저 풀려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살기 위해선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원하는 적당한 직업은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플라스틱 공장에서 잠깐 노동으로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엔 충분하였다.

이번엔 밴쿠버에서 만난 포올 킴이라는 형과 같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우리는 둘 다 결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 속에서 술을 좋아하는 형을 주려고 마지막 남은 돈으로 비싼 양주 한 병을 샀다.

온다는 연락도 하지 않아서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김포  비행기 장에서 내렸다.

먼저 형 집을 찾았다. 동생보다는 형이 무척 보고 싶었다.

어찌 된 일인가? 형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나간 일 년 사이에 41살의 나이로 날마다 술에 취하였고, 어느 날 아침 피를 토하고 운명한 것이었다.

형의 술을 막아보려고 형수는 술을 못 먹게 하는 약을 몰래 타서 먹이고 있었다.

나는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일이 후회스럽게 떠올랐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늘이 내려 준 우리들의 삶의 시간이다.

아버지 가신 지 일 년도 못되어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가슴이 북 바쳐 올랐다.

그 짧은 세월을 살면서 형은 이북에서 나오면서부터 그 고생을 다하였던 말인가?

형은 왜 그렇게 술에 취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단 말인가?

아마도 형은 형이 페렴으로 아팟을 때 어머니와 시골에서 요양하는 동안 벌어진 아버지의 여인에 대한 일로 아버지에대한 반항심과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으로 괴로워했을지 모른다.

우리가모르는 그의 병은 생각보다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양 의대를 졸업한 형, 형도 아버지처럼 유명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처방 의술은 아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제는 형도 떠나고 아버지도 떠나셨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위하여 육체적인 노동도 정신적인 노동도 다 필요하다.

이것이 균형을 잃어버릴 때  인간이 실족한다는 사실

가장 평범한 지혜를 우리는 잊고 살고 있음을! 

 

형을 주려고 비행기 속에서 맘먹고 산  양주 한 병

나는 형의 묘 앞에 착잡하고 슬픈 눈물과  같이 그 잔을 내려놓았다.

형은 건강할 때 국가가  올림픽을 기대하는 역도선수였고 미남이었다.

덕분에 형의 자녀들이 든든한 모습으로

지금 한국과 미국에서도 잘 살고 있음을 형이안다면 형은 기뻐 할 것이다.

 

70장 결혼 (1972년)

   

 

 우리는 한양대학교에 계시는 수학 교수님의 소개로 만났다

내가 처음 캐나다이민을 떠나가 전에 소개로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외국을 드나든 덕분에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오래된 친구처럼 노량진에 있는 조그만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신부 쪽의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나의 성품을 보고 있었고,  내가 영문학과와 약대를 8년을 다닌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있었다. 우리는  결혼해서  캐나다로 떠날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에 대해서는 상관도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잘 살아보겠습니다.”

교육계에서 만 오래 계셨던  최춘호박사는 학교에서 착실한 학생이 사회에 나와서도 역시 잘 살 것이라고, 나에게 말씀하셨고  딸도 활발하여서 캐나다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순수한 감정으로 만났기에  웃을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다.

결혼식 은 간단하고 신속히 진전되었다. 

자연과 산과 나무를 좋아하는 아내는 덕유산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하였다.

우리가 오른 무주구천동의 덕유산은 나무가 많았고 냇물이 흐르는 계곡에 나뭇잎이 흩어지고,

작은 풀꽃이 계곡사이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곳 이었다.

입구에는 큰 돌이 서 있었고 6월의 태양이 뜨거워 힘들게 올랐으나 높은 산봉에 서서 산 아래를 보니,

그 만족감이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높은 산을 처음으로 올랐고 산의 신선함이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우리는 젊다

우리의 시작은  씩씩하고 행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