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 중공군과 미군과 유엔군(1950 -1953년)
1950년 6 25 이후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7월 5에 미국의 스미스부대가 당당하게 이들을 쳐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다.
540명의 군대 중 15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행방불명과 72명이 포로가 되므로 인민군에게 패하였다.
7월 7일에 유엔군이 들어왔고 미군유엔군 총지휘자는 맥아더 장군이었다.
총병력은 34만 1000명이었다. 인민군은 대전까지 점령하였고 미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동부전선에서 한국군만이 동락 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고 낙동강전투에서는 물러서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여 싸우고 있었다.
미군이 1950년 7월25일 낙동강 영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8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북한지도자 김일성의 꿈은 깨지고 있었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달았다.
1950년 10월1일에 피신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차서 서울에 다시 돌아왔다.
1950년 10월26일에는 미군과 유엔군 국군이 북의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고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였다.
전쟁은 거의 미국과 유엔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 유엔군이 북으로 올라오자 자기들의 영토에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1950년 11월2일 생각지도 못한 20만 명이나 되는 중공군이 돌연 한국 전쟁에 개입하였다.
이 사람의 바다라고 부르는 인해전술에 미군과 유엔군은 깜작 놀랐다.
헤일 수 없이 몰려오는 중공군 병사들 인간 무기들에 기계적 무기들은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평양을 내주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 중공군의 공세가 거세어지자 죽지 않으려고 1월 4일 서울 시민들은 너도나도 짐을 싸들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것을 후에 1,4후퇴라 불렀다.
얼어붙은 일월의 한강을 건너서 남으로 향했다.
서울은 피난을 갈 수 없는 사람만 남아 적막의 도시가 되었다.
여기에 유엔군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중공군의 보급로를 공격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평양과 원산에 폭탄을 쏘다 붓기 시작하였다.
보급 원을 완전히 봉쇄시켰다. 보급원이 두절된 중공군은 그때야 공격을 멈추었다.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때의 맥아더장군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그는 중국에 원자탄이 개발되지 않은 것을 알고 대륙을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세력이 너무 커지자 자신의 정치생활에 위협을 느꼈는지
중국과 협상하여 휴전을 선언하였다. 맥아더가 트루먼 정책을 비판하고 나서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이로서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그때 71세의 맥아더장군은 4월 19일 미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old soldiers never die but just faderway
이 한국전쟁은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 하였고 공산 측과 다 합하면 25개국이 되었다.
미군이 5만4000명 죽었고 유엔군까지 다 합하면 25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은 7백 만 명에 다다랐고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남겼다.
45% 이상의 공업시설이 파괴되어 직업 없는 자들과 배고픈 자들이 거리를 헤맸다.
서울 역엔 고구마 한 개로 하루를 때우는 지게꾼들로 붐볐다.
또 고아들은 구두닦이와 거지가 되여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려고 집집 문을 두들기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 일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 증은 서울이란 도시 속에 그렇게 뒹굴고 있었다.
41장 아편과 중공군(1951년)
중공군이야기
작은 누나의 시댁은 동두천의 이름난 부자 집이었다.
이때 중공군은 주둔할 큰집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누나의 집이었다.
누나가 들려준 중공군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굴러다니는 돌같이 말이 없었다.
세수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물을 버리지 않고 다섯 명이 세수를 하고 나면 구정물이 되었다.
“왜 물도 많은데 구정물을 가지고 그러세요?”
“물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대야의 물을 가지고 세수합니다.
할아버지가 첫 순서이지요.” 물은 언제나 아껴 써야 합니다.”
중공군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였다. 그들은 잘 길 들여져 있었다.
밥도 세수 대야에 넣고 같이 빙 둘러앉아서 먹었다.
저녁이 되면 큰 막걸리 독에 주먹 만한 덩어리를 풀었다.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이것 말이요? 이것을 먹으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랍니다.”
그들은 히히히하고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검정 색깔의 덩어리는 아편이라는 것이었다.
아편덩어리를 막걸리 속에 풀어 넣고 휘휘 저은 뒤 돌아가면서 마시고 있었다.
아편을 먹고 전쟁을 하는 젊은이들 그들은 이 전쟁에서 사라지는 가엾은 사람들이었다.
다섯 사람에 한 사람만 딱흥 총(수동형 5발총)을 가지고 있었다.
딱흥 총을 든 중공군이 제일 앞장을 서고 가다가 총 맞아 죽으면
다음 중공군이 그 딱흥 총을 계속 받아가지고 전진한다고 했다.
총이 없는 4명은 고춧가루 후추 가루를 차고 있었고 먹을 것으론 주먹밥 덩어리를 차고 다녔다.
고춧가루나 후추 가루는 동네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낫과 곡괭이를 들고 전쟁을 하였다. 그들은 아편으로 아픔을 잊어버리고 정신이 망가진 채 전쟁을 하였다.
그 누군가가 미리 지시를 하였고 그대로 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운 좋은 자 들만 살아서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상거지가 되었으며 비참하였다.
중공군 중에 북쪽 인민군 장교가 하나가 끼어 있었다.
갑자기 한 중공군이 밥을 먹다가 인민군에게 손 가락 질을 하였다.
“저놈이 중국에 와서 도와 달라고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니요?”
갑자기 그들은 흥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엉겨 붙어 울고 웃었다.
그들이 왜 이런 생명을 살고 가야 되는가?
조국은 무엇이고 권력은 무엇이고 사상은 무엇이던가?
생명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기에 태어났다.
이유 없이 불바다 속으로 타들어가서 그대로 재가 되고 있었다.
누구를 미워할 줄도 몰랐다. 혹시나 살아서 돌아기 기를 바라는 허망과 희망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묻고 싶다.
중공은 조선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또 자신의 나라 영토를지키키 위하여 이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야 했는가?
중공군은 비행기가 공중에 뜨면 쏜살 같이 도망하면서 중국말로 래래래래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비행기가 온다는 소리로 모두가 래래래래 다시 소리치면서 여기저기로 숨어버렸다.
미군들은 기어 다닐 줄을 모르고 총만 믿고 서서 다녔다.
숨어있는 중공군의 눈에 발각되어 수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중공군은 고양이처럼 기어 다녀서 무기 없이도 잘 살아남았다.
하루는 중공군하나가 동네 여자를 강간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장은 중공군을 다 불러 모았다.
"개놈의 새끼하나가 남의 나라를 도와주러 와서 나쁜 짓을 하였다. 어떤 놈이냐?"
중공군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고 숨소리 내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대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부하에게 가서 옆구리를 푹 찌르며
"총알이 아까우니 저 놈을 목을 매어 죽여라." 그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그상황속에서도 중공군은 잘잘못을 가르는 일이 있었고 도를 지키고있었다.
아무도 책임지지않는 생명이 피를 흘리며 파편처럼 박혀있었다.
중공군은 젊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타국에 끌려와서 아편을 마시고 광기속에 눈을 번득이다
남의 땅에서 부모형제를 부르며 사라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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