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큰형이야기
큰형은 원래 약하게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희망이었다.
아버지를 살아있게 하고, 힘을 주는, 나는 오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그를 의사를 시킬 꿈을 키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큰형에게 의과대학 노래를 불렀다.
큰형은 1947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본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버지의 기쁨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동네사람들이나 손님들에게도 큰아들 이야기를 할 때가 아버지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형은 아픈 소식을 감추었다. 공부를 계속하지 못할 상태가 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도 전쟁 통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잘 먹지 못하고 굶주림에 지쳐있었다.
그는 병중에도 잘 먹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형은 일본에서 병명이 폐병이었다. 물까지 차 있었다.
아버지는 대번에 세브란스로 찾아가서 살려 달라고 사정하였다.
폐병은 아버지가 살릴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스트렙토마이신이 없었던 그 당시 세브란스에서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낙심하여 일을 제대로 못 볼 정도였다.
형은 어머니와 같이 시골로 내려가 요양 생활을 하였는데 하루는 운이 나쁘게도
청년단 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몰매를 맞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화가 난 둘째형은 학교도 나가지 않은 채 시골로 내려갔다.
형을 때렸다는 자를 산길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는 그를 작대기로 패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픈 몸에 푸른 멍 으로 신음하는 불쌍한 형
아버지에게는 쉬쉬하였지만 나 역시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내가 가서 본 큰형은 정신까지 불안하게 앓고 있었다.
나는 형에게 다가가서 형의 손을 잡으며 "많이 아파? "하고 물었다.
형은 가늘게 대답하였다.
“선평아
가슴이 답답해서 그래.”
큰형은 가슴을 펴고 마루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평아!
성냥하고 석유를 좀 가져다줄래.
가슴에 불을 지르면 좀 시원할까?”
얼마나 숨쉬기가 어려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큰형은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피곤한 듯 곧 잠이 들었다.
형은 마를 대로 말라있었고, 종이 장 같이 흰 얼굴이었다.
매를 맞고 난 며칠 후에 큰형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나는 형을 알고 있었다.
형은 사는 동안 잘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아버지가 한의사 시험을 보느라고 잠적했을 때도 형은 직업을 찾으려고 약한 몸으로 헤매고 다녔다.
유리상점에 취직 되었다고 좋아하던 날, 형은 자전거로 유리를 싣고 가다가 박살을 내고 다쳐서 돌아왔다.
그래도 그는 다음날엔 우체국에 가서 직업을 얻었다.
편지를 나르는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힘껏 도왔다.
비가 홍수가 되어 내려 다리가 끊어져도 그는 그 비를 다 맞으며
편지 나르는 일을 하루 종일하고 끝없이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아버지는 장남인 형이 든든하고 책임감이 있다고 좋아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고칠 수 없는 병으로 그는 죽고 말았다.
형이 가버린 후 아버지는 희망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 약한 것을 일본에 보내서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선평아 술이나 한 병 사 오거라"
평소에는 잘 대지도 않던 술을 내게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잠이 드셨다.
말수도 적어지고 족보를 이어 줄 대가 끊어졌다고 술만 마시면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한의사가 되고 그놈이 양의사가 되어 돌아오면 춤이라도 출가했는데......,”
몇 년이 지나 아버지의 슬픔이 어느 정도 가라 잊었다고 생각될 즈음이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들었다.
그는 부자 집 귀공자처럼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이 송구라고 합니다. 이 집이 종규집인가요?”
아버지는 그 젊은이를 알지 못하였다.
“글쎄 내 아들인데......,”
“제가 일본에서 같이 의학 공부를 하던 친구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때 충격으로 하얗게 핏기를 잃고 있었으리라
“종규가 찾아오라고 주소를 적어 주었습니다. 이제 막 의학공부를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가엾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여태껏 어떤 환경에서도 열심히도 살아온 아버지니까,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믿고 있었다.
37장 아버지의 희망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은 내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나는 우울한 아버지가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교 가는 일 빼놓고는 나는 아버지와 항상 같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약을 썰었고 환을 만들었고 약봉지를 만들고 저녁이면 같이 돈을 세었다.
아침이면 새벽에 일어나 생선시장에 갔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생선을 사가지고 왔고 과일을 사가지고 왔고 아버지가 한 말씀 안 하셔도 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어느 날은 안방으로 건너가지 않으시고 내 방에서 자기를 원하였다.
나를 따뜻한 아래 묵에서 자게 하였고 자신은 위 묵으로 올라가 주무시었다.
하루는 돈을 세다가 네게 물었다.
“너도 이 아버지만큼 돈을 벌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웃으면서 그럴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면 너도 자식이 잘 되게 하려면 언제나 부모의 희생이 필요한 것을 기억하여라.
그것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허기야 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나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것 같다.”
“흠,,,,,,.
선평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다른 때보다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이젠 네가 이 집 안의 심줄이 되 거라! 너를 믿는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마음의 소리였고 부탁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버는 대로 금고에 넣었고 돈을 차곡차곡 모은 뒤 사귀동의 땅들을 다시 사들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학비는 미리미리 챙겨주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시 삶의 희망을 걸고 있는데, 정말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등불이 되고,
이집안의 기둥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위하여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나는 가슴을 두들겼다.
38장 유 아저씨(1950년)
1950년 6 25가 터졌고 북한인민군은 서울까지 진입하였다.
우리는 그때 서대문 현저 동에 살고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형무소를 열라는 인민군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간수는 정부의 명령 없이 문을 열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문을 지키는 간수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탱크가 간수의 시체 위로 핏물을 뿌리며 처 들어가 버렸다.
감방의 문은 열리고 죄수들은 거리로 쏘다져 나왔다.
그전에 아버지는 가족들이 숨을 수 있게 집 안쪽 목욕탕 밑으로 굴을 뚫었다.
굴은 안마당을 지나서 장독대로 가기 전에 사람들이 같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만들었고.
다시 좁아져 장독대 옆으로 나갔다. 모두가 총소리만 터지면 그 속으로 쏜 살같이 몰려 들어갔다.
숨을 곳이 없는 동네 사람들도 들어왔다.
인민군 (북한군인)자치단체들은 집집마다 들어와서 인민군 붉은 깃발을 수도 없이 그리게 하였다.
사람들은 붉은 깃발 그리는데 신물이 났고 며칠 후에는 다시 와서 거두어갔다.
아버지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자식들을 분산시키기로 마음먹었는지 하루는 유 아저씨를 불러들였다.
유 아저씨는 영천시장에서 떡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
늑막염이 걸려 다 죽게 된 것을 아버지가 무료로 치료를 해주어서 보름 만에 일어난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아버지의 어려운 일은 도 맡아서 해주고 있었다.
“여보게, 유 선생 내가 아무래도 아이들을 두 곳으로 분산시켜야겠소.
하나라도 살려야지 이렇게 있다간 집안이 끊어질지도 모르니.”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다 걱정하는 일이지요.”
“자네가 이 애 둘을 데리고 자전거로 사귀 동으로 데리고 가 주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데......, ”
그는 아버지의 말에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전거가 두 대가 필요할 것이니 제가 또 한 사람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는 곧 타 동네로 나가서 건강한 청년하나를 데리고 왔다.
작은형은 서울 집에 남았다.
나는 그 유 아저씨 자전거 꽁무니에 실렸다. 그리고 다른 자전거 뒤에는 동생이 탔다.
우리는 뒷길로 냅다 달렸다.
길은 꼬부라지고 나는 안 떨어지려고 죽기 살기로 아저씨 허리에 매달렸다.
의정부를 더 내려갔는데 간사약기가( 비행기) 그대로 폭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자전거를 버리고 노깡으로 만든 다리 밑으로 구르면서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굴속엔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검은 굴다리 속에 사람들의 눈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비행기는 점점 낮게 떠 오고 있었다. 그때 한사람이 나를 안으로 잡아당겼다.
“예, 이이 종 간나 새끼 들 반동분자가 아닌가?
빨리 이쪽으로 더 들어 오라우! 너희들 때문에 다 죽게 생겼으니.”그러더니 또 소리를 질렀다.
“안 죽고 살려면 두 손을 짝 벌리고 벽에 딱 붙어라!”
그러고 보니 모두가 십자가처럼 손을 벌리고 낙지처럼 시멘트벽에 붙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사이 놀라운 불길이 중간으로 태풍처럼 지나갔다.
벽에 붙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불길에 휩싸여 타버렸을 것이다.
그 불길은 바로 옆에 있는 철로다리를 끊느라고 떨어진 것이다.
그 화염이 노깡 속으로 불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간 것이었다. 다시 인민군이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들 비행기를 데리고 온 줄 알고 혼이 났네! 어서 꺼져!”
우리는 눈치를 보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날 살려라”하고 다시 자전거 꽁무니를 올라타고 뒷길로 달려서 사귄 동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고마운 유 아저씨의 덕분으로 그 어려운 시기를 시골에서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다.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도 학교에 나간 순진파가 있었다.
또 인민군을 도운 열성파 학생들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대로 끌려갔고, 학교가 정돈된 뒤에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친구들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슬퍼하였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여전히 운동장에서 볼을 차고 놀았다.
'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2장 인민장교의 첫사랑 (2) | 2023.02.04 |
---|---|
제40장 중공군과 미군과 유엔군(1950-1953년) (2) | 2023.02.03 |
제33장 신탁통치 문제 (2) | 2023.02.01 |
제30장 대한민국 (0) | 2023.01.31 |
제26장 큰누나의 이남방문 (2) | 2023.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