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장 S 대학교 내과과장 이문호박사님
하루는 젊잖은 분이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저는 S대학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습니다.”
“어떻게 박사님이 이곳까지......,박사님의 명성은 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군상이라고 합니다.”
두 분은 악수를 나누었다.
"누추하지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어떻게 저의 집을?"
아버지는 방석을 깔고 어렵게 손님을 대접하였다. 두 분의 솔직한 대화는 시작되었다.
“제 아내가 늑막염인데 이 선생님이 고쳐 주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선생님은 잘 모르시지만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선생님이 고친 환자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래요, 전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님이 더 잘 고칠 수 있는데 왜 내게 부탁하시는 것인지요?”
“ 이 선생님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고치는 것은 주사기로 물을 빼고 스트렙토 마이 싱으로 고칩니다.
그런데 나중에 엑스레이를 찍으면 그 자국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선생님이 고쳐낸 고연 단을 먹은 환자는 신기하게도 그 자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환자엑스레이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요 저는 양약이 훨씬 잘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참말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약으로는 고치는데 시간적으로 오래 걸리는지요?”
아버지는 대답하였다. “환자에 따라 틀리지만 보통 15일 정도 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양약과 별 차이가 없군요.
아내와 같이 외국을 곧 나가보려고 합니다.
엑스레이를 찍어서 공항에서 검사를 받아야 되는데, 그것이 찜찜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랬다 그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려면 신체검사가 정말로 엄격하였다.
조금이라도 폐 같은 곳에 이상이 있거나 몸에 충이 있으면 그대로 거절되었다.
엑스레이에 이상이 있으면 다시 조사를 해야 하고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이 큰 것이었다.
“허허허, 그래요. 한약이 그 자국을 안 남긴다니 반가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의 머릿속에 상쾌하게 지나가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준비된 것처럼 그대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제가 자신하고 고쳐줄 것이니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버지는 박사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세요.”
“사실은 아들이 일본에서 의대를 다니다가 폐병이 들어 돌아왔습니다.
일 년 만 기다려 주었어도 마이싱으로 살렸을 것인데 약이 없어 영리한 자식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셨군요. 마음이 아프셨겠습니다.”
“ 우리 집안을 이어갈 제일 영리한 자식이 그렇게 되고 보니 희망이 없습니다.
나는 아들하나를 박사님처럼 양의사를 시키고 싶은 게 소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진지하게 말씀하였다.
“사실은 저에게 외대 영어과에 합격한 자식이 있는데 의대로 전학시킬 수가 있는지요?”
“ 이 선생님 요즈음 외대 영어과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이번엔 박사님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세상이 영어를 배우느라 신풍이 불고, 변하였다고는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는 아들의 마음을 억지로라도 다시 바꿀 생각입니다.
듣기로는 학교마다 교수님들이 보결생을 하나씩 넣을 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같은 일류대학도 학교사정이 좋지가 않아 교수월급도 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정부가 인정하였습니다.
어느 대학이든 학교에 돈을 내면 교수가 1 사람씩 보결생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외국어대학 영어과에 다니고 있는 아들을?
“ 박사님 아들을 양의사를 시키고 싶습니다.”그게 제 소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 선생님 저에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학교에 등록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여 고쳐드리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을 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박사님의 아내를 깨끗이 고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의대로 전학하지 않았다.
나는 1년을 꿇고 싶지도 않았고 환자를 대하는 것은 아버지 옆에 있는 동안으로 충분하였다.
의사는 아버지처럼 봉사정신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난 좀 더 밝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는 외국에 나가고 싶은 시대적인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자유로운 삶, 내가 하기 싫은 공부를 할 수가 없었ek.
나 스스로가 합격을 하지 않고 부탁을 하여 들어간다는데 자존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통사정을 하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그 뒤로는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속이 상한 것만큼 나도 속이 상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하였다.
55장 1960년 4 19 항쟁
나라가 부정부패로 가득하던 1960년 외대 일학년 때 학생들의 4 19가 터졌다.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 들로 시작된 데모는 수백만의 학생들을 전국에서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3 월 15일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과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타도하고 나섰다.
진실한 자유주의적 물결이 독재정권을 향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4월 19일 날 미친 듯이 서울 거리로 몰려나온 대학생들에 대한 무차별 사격으로 186명의 사망하였다.
수천 명의 피 흘리는 부상자로 서울은 온통 난리였다.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는 성명 발표가 라디오를 통하여 흘러나왔다.
그때 당시 총 권력을 부정으로 휘두르던 자유당의 책임자 이 기붕 씨였다.
그는 아들이 쏜 총 의하여 전 가족이 사망하였고 아들도 자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씨를 잃은 비참한 심정을 안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어느 세상에도 민주주의는 희생 뒤에 소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선 학생들의 희생이 민주주의의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그날 고대 학생들이 선두를 가고 있었다.
외대학생들은 그 뒤를 달렸고 가다가 서울 대 학생들이 합쳐졌고 같이 중앙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청와대로 향해 가기에 혼자서 살겠다고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가고 있는데 역행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중에 고등학교 친구인 이기섭이라는 고대 친구가 반대쪽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기섭아 하고 크게 불렀다. 기섭이는 나를 보자 나를 순식간에 낚아채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의 손에 이끌려 다음 골목으로 들어갔다.
"웬일이야?"
"잔소리 말고 따라와
저쪽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피를 흘리고 야단이야! 일단 여기서 피해야 돼!"
몸이 재빠른 그는 이미 앞줄에 섰다가 간신히 도망친 것이었다.
우리는 골목길을 달리고 담을 넘어 낯선 집 앞마당에 들어섰다.
골목마다 순경이 우리 같은 자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밤이 될 때까지 그 집 부엌 옆에 달려있는 창고에 숨어 있었다.
아침 새벽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내가 병원에 있거나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셨는지,
어머니는 나를 보자, 나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고 설음을 토해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적십자병원은 길가를 꽉 메울 정도로 부상자들과 가족들로 가득 찼다.
1960년 4. 19 어쩌면 4 19의 총성 속에서 기섭이는 나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한 은인일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모여서 술렁대었는데 죽은 자들과 다친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학생들의,
단절된 삶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중국어학과에 다니던 나의 친구 민 정규는 중국말 몇 마디로 고난을 면하였다.
그는 뛰어서 담을 넘고 어떤 집 속에 숨어 들어갔다.
따라오던 경찰이 문을 심하게 두들겼다.
안주인이 나오며"웬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여기 금방 학생이 들어왔지요?"
"아닌데요."
아주머니는 똑 잡아떼었다.
분명히 들어왔는데......,
잠깐 방을 수색하겠소.
그때였다. 학생이 중국말을 쏼랑 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이 학생은 누구요?"
"우리 집에서 하숙하는 중국 학생인데요."
영리한 아주머니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부모들은 어떻게든 학생들을 살리기에 마음이 하나가 되어있었다.
경찰이 가버린 뒤 민 정규는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중국말을 쌀랑거리며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피를 흘리며 자유주의를 외치던 4 19 학생운동도 격동의 시기에선 다른 혁명을 앞에 두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젊은이들의 피 냄새가 가시도전에, 민주주의 싹은 그렇게 다시 문드러지고 있었다.
'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7장 무릉도원의 꿈 (0) | 2023.02.15 |
---|---|
제56장 한신장군 (2) | 2023.02.13 |
제52장 밤송이 와 눈물 (0) | 2023.02.10 |
제49장 내친구(장광이) (2) | 2023.02.08 |
제48장 새야새야 파랑새야 (작은누나) (0) | 2023.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