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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너의아버지의 나라는한국

제49장 내친구(장광이)

by 산꽃피는캐나다 2023. 2. 8.

49장 내 친구(장광이)

 

  우리가 피난에서 돌아오니  피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또 죽은 사람, 이북으로 간사람 들로 서울은 인구가 반도 차지 않았다.

희문학교는 그때까지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희문학교는 임시로 세종로 뒤에 있는 여자 중 고등학교에 입주하여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실엔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 나이가 많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이장광! 장광이를 중심으로 그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낙제하였다고 하였고 매일 뒤에 앉아서 흐흐흐 하고 아이들을 못살게 굴었다.

힘 못쓰고 약한 애들은 대항할 염두도 못 내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시간이 닥치면 선생님은 책상을 간격을 주어 일 열로 앉게 하였다. 영어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장광이는 영어선생이 옆으로 지나간 뒤에, 내 뒤에 있는 아이를 쿡쿡 찔러 뒤로 보내고 내 뒤 자석에 앉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 차례였다.

선생님만 지나가고 나면 내 잔등을 찌르고 못살게 굴었다. 시험지를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안된다고 손짓을 해도 계속 등을 연필 꼭지로 찔러대는 것이다.

시험지를 뒤로 보여줘도 싫다는 것이다. 내 시험지를 낚아채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었다.

이젠 주먹으로 잔등을 폭하고 쳐 왔다.

등뼈를 맞았는지 여간 아프지가 않았다."빨리 바꿔"

그래도 내가 내놓질 앉자 “ 너 있다 죽을 줄 알 어” 하고 작은 소리를 내었다.

나도 등이 몹시 아파 약이 바짝 올라서

“그래 해볼 테 면 해봐”하고 대답하였다.

다행히 선생님은 다른 쪽에 있어서 보지 못하였다.

나도 제대로 시험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게 원수 같은 시간이 끝이 났다.

선생님이 나가시자. 그는 대번에 눈을 부라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도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 누가 겁 날줄 알아?" 오기가 나서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다.

아이들이 우리 옆으로 몰려들었다."웬일이야?""글쎄 이 자식이 나하고 붙겠단다.

쪼그만 자식이 까불고 있어. "그는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그래 시험 다 끝나고 붙자."나도 지지 않았다. 친구 강모가 걱정하면서 심판이 되겠다고 나섰다.

"시험 다 끝나고 도망이나 치지 마! 약질아!"그는 눈알을 크게 떠 보이며 약을 올리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맞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고 난감하였다.

그러나 길이 없었다. 드디어 다른 시험이 다 끝났는데 돌아보니 그가 없어졌다.

잘 되었구나 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앗, " 그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집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언제 집에 갔다 왔는지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군화를 신고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젠 죽었구나." 나는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겁이 났다.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아이들은 더 신이 났는지 자리를 잡기 위하여 골목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내 측은한 운동화 짝을 바라보면서 아이들 뒤를 따라갔다.

우리가 몰려가서 둥그렇게 서서 떠들어대자,  중년여자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어디서 싸움질을 하려고 해!  순경 부르기 전에 집으로 가지 못해!"

여인은 날카롭게 소리를 치며 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우리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한 아이가 말하자 "그럼 뒷산이 좋겠다." 다른 아이가 대답하였다.

우리는 몰려서 한 10분쯤 걸어서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전쟁 때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었다. 벌판처럼 뭉그러져 그전에도 몇 번 올라온 곳이었다.

아이들은 이 엄청난 싸움에 내가 죽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법을 정하느라고 한쪽에선 웅성대고 있었다.

아마도 강모의 심각한 얼굴이 나를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사적으로 격투를 한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선언을 하였다.

드디어 격투가 시작되었다. 장광이 세 번을 치면 나는 한 번을 치는 정도로 맞고 뒹굴었다.

배를 안고 뒹구는 나를 그놈은 계속 찼다.

나는 계속 맞다가 안 맞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그놈의  다리를 쥐고  늘어졌다.

그래도 못 당하여 나는 그놈의 다리를 꽉 물어 버렸다.

그리고 다리를 문체로 놓질 않았다. 그때 그놈이 너무 견딜 수 없이 아팠는지 꽈당 당하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그때라 하고 악에 바친 나는 주먹을 쥐고 그놈을 힘껏 내려쳤다. 얼굴을 때린 것이 정통으로 맞아 들어갔다.

그는 얼굴을 쥐고 "아 야야!"하고 뒤로 넘어갔다.

둘 다 넘어지자 아이들은 서로를 떼어놓았다. "무승부다 무승부야!"

"무승부야 무승부!" 아이들은 그렇게 떠들어대었고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끝이 난 것이 나에겐 천만다행이었다.

내 얼굴은 코도 터지고  눈알만 빼놓고는 엉망이 되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으나 아버지가 알까 봐 쉬쉬하였다.

나는 골방에 들어가 한쪽으로 몸을 틀고 고양이 잠을 잤다.

이튿날 책가방을 가지고 학교에 갔는데 장광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학생들은 장광이가 출석을 하지 않자 이일로 흥미롭게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영웅이 되고 있었다.

서로 얼마 나 차고 박치기를 했는지 나도 성한 데가 없이 아파왔다.

그다음 날에 장광이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런데 장광이가 내 앞으로 오더니 손을 내밀었다."우리 앞으로 잘 지내자!"

"그래."나도 멋쩍게 그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시험지를 바꿔주었으면 졸업하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뒤 장광 이는  해병대를 지원해서 들어가고 말았다.

의정부 군대에서 장광이의 편지가 두 번이나 날라들었다.

"내 친구 선평 아! 잘 지내느냐 여기에서는 내가 제일 어린 병사다.

그러나 용감무쌍하게 잘 해내고 있다.

나는 네 용기가 마음에 들어 너를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잘 지내 거라. 꼬마 친구야!"

  그는 어린 나이에 자진해서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군화를 신고 나타난 그는 내가 스스로 물러나 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아마도 나를 더 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을 가 봐서 참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는 내 체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뒤로 그 누구보다도 그가 신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다리를 물어뜯고 놓지 않은 것을 떠벌리고 돌아다니지 않았으니까.

살아있다면 한 번쯤 꼭 보고 싶은 친구이다.

내 친구 장광이

   

  50장 피난살이 그 뒷 이야기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전쟁 통에서도 사람들은 조금 익숙하게 살고 있었다.

서로 오가며 감자나 고구마도 나누어먹고 도울 일이 있으면 오가며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하루는 김 선생님의 딸, 어느 날 아침 집을 나가버린 전쟁통에 불행한 일을 당했던 소녀!

행방불명이 도 소녀가  집을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글쎄......, 그

나는 그때 사람들이 수근 대는 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네는  소녀가 돌아온 일로  들뜨고 있었다. 내가 본 소녀는 그때의  소녀가 아니었다.

비싼 옷을 입고 있었고 파마머리에  멋진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누나라고 부르지도 못했고 그 누나도 고개를 돌리고  나를 아주 무시해 버렸다.

  나는 중학교 때 전차를 타고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태원을 지나칠 때면,

요란한 화장을 하고 서있는 여자들을 본 기억이 있다.  양공주라고 불리고 손 까락 질을 받던 여자들, 

그때는 왜 저렇게 살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우리 이웃의 소녀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들까지도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지 못한 소녀가  살기 위해 찾아간 곳은 어디였을까?

힘이 없는 정부는  그런 소녀들을 도와주지 않은 채 거리로 나가게 하였다. 

지금 부모에게 땅을 사라고 큰돈을  다 내놓고 어디론가 다시 떠나버린 소녀!

김 선생님의 어여쁜 딸, 우리들의 누나였다.

우리는  그 소녀들의 일부가 미군병사들을 따라 미국에 최초로 들어갔고, 한국경제에 헌신하였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누나라고 부르며 우리 손을 잡고 놀았던  순진한 소녀

피난길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돌덩이 가 가슴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민들레 홀씨는 그 어디에서도 노란 꽃을 생생하게 피우며 살아난다.

그 어떤 환경 속에도  살아가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희망의 꽃을 피우며 끈질기게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51장 아버지와 산동네

 

 가난한 이웃들(휴전시대 1953년)

휴전은 되었어도 사람들은 그동안 직업을 잃었고 가난에 찌들고 먹을 것이 없었다. 

인왕산 밑 형무소 뒤에는 산 동네가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약한 첩 먹지 못하고  마른 낙엽처럼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돈이 없어 시체를 화장하고 매장하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

양의사를 불러 부검을 하고 진단서를 첨부해야 하는데 양의사를 부를 돈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의지할 곳 없는 산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찾아 내려왔다.

아버지는 가방과 청진기를 들고 산 동네를 올라가시곤 하였다.

아버지는 죽은 환자들의 눈을 검사하고 사인을 확인한 후에 사망 진단서를 만들어 주었다.

의사 면허증 번호를 적고  도장을 찍어주어 화장할 준비를 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그 가난한 시대의  산꼭대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소문이, 산동네 사람들을 더 불러들였다.

그들은 무엇이든 아버지에게 빚을 갚고 싶어 했지만   딱한 사정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돈을 받지 않았다.

이 일은 후에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지  동회장이  감사하다는 표창장을 보내왔다.

그 후엔 구청장도 고맙다는 편지와 같이 표장 장을 보내왔다.

 

 우리 집은 서대문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언덕을 걸어서 우회전을 하여 적십자병원 앞으로 해서 돌아오시곤 하였다.

하루는 적십자 병원 앞에서 아이를 붙잡고 통곡하는 부부를 보았다.

“무슨 일이시요?”

아버지는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여인은 울면서 말하였다.

“글쎄 이게 우리 외아들인데 보증금이 없다고? 급성 맹장염인데....... 죽을 것이지요?

여인은  두 손으로 아이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는 말하였다. “일단  돈보다는 사람목숨이 먼저인데....., 어찌 된 세상인지.....,

나도 의사이니 내 집으로 가봅시다.”

 “살려주세요! 의사 선생님!”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따라오세요.”아버지는  서둘러서 영천 한의원으로 데리고 왔다

아버지는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하고  약을 지어주었다.

“자! 이약을  저쪽으로 가면 방이 있으니 지금 다려서 먹이도록 하세요. 

 2-3시간이 지나서 당기고 아프던 것이 없어지면 괜찮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방법으로 해봅시다. 내가 병원으로 서둘러 보낼 것이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맹장에 있어서는 자신 있는 처방을 가지고 계셨다.

보통 2-3 시간에 고통은 멈추었고 다음날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의원은 옆에 있는 일본 적산 집에 칸을 막았다.

또 옆으로 작은 집을 지어서 환자수용실이 여러 개 있었고  간호 원들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어린 환자는 3시간 만에 고통을 멈추었고 이튿날  몰라보게 좋아졌다.

“고맙습니다.” 그  부부는 은혜를 갚고 싶어 했지만 한 푼의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먹을 만큼 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오.

아들을 잘 먹여서 당분간 살펴주어야 할 것이요.”그들은 고마움을 금치 못하고 떠나갔다.

얼마 후 아버지는 똑같은 증세의  환자가 찾아들었다.

적십자병원에서 쫓겨 난 다른 환자가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제가 병원 앞에서 울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곳을 알려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그 은혜는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우선 증상을 들어 봅시다.”

그 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지금 누가 상상이나 할 것인가?

사실상 적십자 병원 앞에는 보증금이 없어 수술을 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병과 빈곤 속에   고칠 수 있는 병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음을......,

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그 빚을 갚으려고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다시 찾아왔다.

명절날이면 잊지 않고 떡과 과일을 싸들고 아버지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

급성 맹장염을 고친 외아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다시 찾아왔고 아버지는 외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어느 사람은 후에 땅을 팔았다고 돈을 들고 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집안일을 해주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이번엔 멀리도 알려져 서울시로부터  표창장을 받게 되었다.

후에 아버지는 미군부대로부터 나오는 마이 싱으로 사람들을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한의사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기에 아버지는  성병을 고쳐달라고 미군들이 가지고 오는 마이 싱을  놓아주면서 허허하고 말씀하셨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들한테서 부러운 것이 있소. 크고 건강한 체격이요.”

그들은 아버지를 다크터 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계속 더 바빠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점점 많아지는 손님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고 편하게 쉴 시간이 없었다.

밤이면 새로운 병으로 오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밤새도록 책을 보시는 날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점점 건강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