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 밤송이 와 눈물
사귄 동 우리 집에는 반들반들한 통나무 바둑판이 평상 위에 있었고 동네 어른들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주위에는 언제나 훈수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바둑을 두지 않았으나 그들이 오가는 것을 반겨하셨다.
그들 중에 우리 집에 와서 바둑을 두는 수염을 기르고 있는 점잖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이조시대에 관직을 지냈다하고 바로 우리 집 옆에 만평이나 되는 땅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그 넓은 땅에는 군데군데 커다란 밤나무가 잎사귀를 가득히 달고 있었다.
가을이면 밤송이가 수도 없이 초롱초롱 매달렸다.
우리는 다람쥐나 아니 밤 귀신처럼 밤을 먹어대었다.
밤을 다 추수한 후엔 밤 껍데기는 한쪽에 동산처럼 한쪽에 쌓아놓았다
. 나는 동생을 데리고 닭이 뒷발로 모이를 헤치듯, 그 속에 남아있는 밤을 찾아내었다.
그러다가 그 집 큰딸에게 들키면 냅다 도망을 쳤다."
저것들이 이렇게 다 퍼질러 놓으면 어떡하란 말이야!"
큰딸이 부짓갱이 를 들고 쫓아왔다. 우리는 잽싸게 뒷마당으로 빠져나갔다.
그 밤 밭을 아버지가 사들였을 때, 동생과 나는 정말 신바람이 났다.
밤나무도 올라가 보고 밤을 발길로 차고 동네 아이들에게 밤을 준다고 다 불러 모으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희문학교를 다닐 때, 내가 밤나무 밭 자랑을 한 것이 말썽이었다.
친구 영환이가 밤을 따러 시골로 내려가자고 졸랐다.
"그래 그럼 토요일에 가서 실컷 밤을 따 가지고 일요일에 올라오자!"
역적모의는 끝이 났고 우리는 책가방 대신 빈 가방을 메고 털털거리는 시골버스에 올랐다
밤은 무르익었고 톡톡 떨어진 알이 여기저기 고슴도치 같은 바늘을 달고 반쯤 주둥이를 열고,
밤나무를 처음 본 영환이 는 신이 날 때로 나서 밤나무 위로 곧장 기어 올라갔다.
밤나무를 흔들 참이었다.
그때였다. 그가 올라가는 것을 올려다보던 내 눈동자에 날카로운 밤송이가 그대로 꼬치고 말았다.
나는 죽을 듯 신음소리를 내었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 한 번의 실수로 나는 그날부터 눈물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가 학교에 며칠을 결석을 하고 안 나타나자
이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주신 분이 있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민 비의 친척이 애국자들을 키우기 위하여 세운 최초로 사립학교가 희문이었고 가깝다는 이유로 희문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교장선생님을 보자, 두 손을 잡고 둘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교장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아니 어떻게 여길?”
“제가 희문에 교장이 되었습니다.”
“아, 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늦어졌습니다.”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저도 정말 반갑습니다.
그때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을 당 할 번하였습니다.”
나는 두 분의 반가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급 할 때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본을 도왔다는 일제강점기의 분풀이로 거리에서 청년들에게 거리에서 몰매를 맞고 사경에 있던사람
싸움을 말리고 그분을 보호한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분은 다시 희문의 교장이 되어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 편이었지만 지성인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셨다.
쌍 꺼풀 진 큰 눈은 언제나 빛이 났고 흰 살결에 용모가 반듯한 아버지!
아버지가 외출하실 때는 양복 입으시기를 좋아하셨고 신식 모자와 단장을 든 멋쟁이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지 못한 공부에 한이 많은 분이었다.
그 공부를 자식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분이었다. 일본으로 의학공부를 보낸 아들을 잃었고, 그런데 나는?
밤송이에 한쪽 시력을 잃어가며 신음하고 있었으니 아버지의 상심은?
이 비참한 모습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유명한 공 안과를 찾았다. 또 서울대학 병원에서도 눈 수술을 을 거듭하였으나 한쪽 시력은 거의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쪽의 시력이 나빠지자 눈알이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여 나는 거울 드려다 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날카로운 밤송이가 내 눈을 정통으로 박힌 사고여서 동공의 렌즈가 망가져 있었다.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각막수술 렌즈를 갈아 낄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의술이 좋아지면 눈도 다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때를 기다려보자”
아버지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있다고 하였다.
눈으로 삶을 비관하고 있었던 사춘기시절
나는 눈 때문에 그 고통으로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형! 형!
큰형이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아버지는 나와 항상 같이 있고 싶어 하셨고
우울증으로 몸도 점점 말라가는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의 편애가 시작된 것이다.
편애! 아버지의 편애
나를 믿고 계셨던 아버지는 후에 나 모르게 재산을 내 이름으로 해놓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이 편애가 후에 자식들을 불행하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나 하셨을까?
형제사이를 시기와불행 속으로 몰고 간 이 편애라는 것을 현명하신 아버지가 미리 짐작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53장 아버지의 소망
큰형의 친구가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죽은 형을 찾아온 뒤로 아버지는 술을 드시기 시작하였고,
가끔 한숨소리도 새어 나왔다."일 년만 더 살았어도 이 마이 싱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을......,
내가 살려내지 못한 자식,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아버지는 스트렙트 마이 싱 병을 빙빙 돌리면서 그렇게 가슴 아파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술집도 찾으셨고 돌아오시면 노래 가락을 부르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별도나 밝고......, "
"선평아 네가 꼭 양의사가 되어 내 원을 풀어 줄 수 있겠느냐?
네가 우리 집안의 대들보가 될 수 있겠느냐?
산맥에도 줄기가 있고 강물에도 큰 흐름이 있다.
우리 집안을 빛 내거라. 족보도 맥으로 흘러가야지 이름 석자만 올려서 무엇을 할 것이냐?
네 할아버지는 내게 한을 주었다. 배우지 못하게 내 앞길을 막았다.
나에게 무식을 물려주었다. 내가 어려서 신학문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에겐 한계가 있다. 내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나는 아무것도 될 수가 없었다.
의사가 되어도 양의사가 되어야지! 생살에 부황이나 뜨고? 침으로 병을 다 고친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영리한 자식하나 양 의사 시키려고 하였더니
내가 죽고 그놈이 살아서 세상을 바꿔 놔야 했는데......, "
아버지는 술에 취해 또 우셨다. 그러다가 또 말씀하셨다.
"선평아 내가 버는 돈! 이 돈이 무엇이더냐?
내가 왜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밥을 주고 학비를 주는 줄 아느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속은 타서 재가 된다.
너는 얼마든지 배우고 싶을 때까지 배워라. 사람은 배워야 한다.
돈 걱정은 하지 마라. 그것은 내 몫이다.
내가 돈 대신 족보를 가슴에 감고 이북을 떠나올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느냐?”
아버지는 다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잠이 드셨다.
나는 아버지를 이불로 덮어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밤 속에 서서 아버지의 외로움을 짐작하였다.
"큰형이 살아있었더라면! 아버지가 그처럼 좋아하던 큰형이 살았더라면!"
아버지는 술을 들지도 않았고 내 앞에서 초라하게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큰형이 그리워졌다. 지금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있었지만 나는 양 의사가 되려는 꿈은 조금도 없다......,
나는 의사라는 그 말 자체도 싫다.
이런 내 마음을 아버지는 이해하실까 나는 아버지를 외롭게 할 것이고,
나대로 고독한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아버지를 보면서 죽기보다 더 싫은 의사의 길을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해에 나는 의과대학대신 외국어대학,
정말로 좁은 문, 영어과를 40대 1의 벽을 뚫고 들어갔다.
마음이 어두워진 아버지는 그 뒤로 내게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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