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돌아온 남편
후덕 지근한 날씨에 가랑비가 나른하게 쏟아져 내렸다.
덕이 씨는 도라지 밭에서 일을 하는데 이젠 익숙해졌다.
하루 종일 땅을 파고 돌아와도 이튿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무리 피곤해도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은 편안했다.
그날도 일에 지쳐 힘들게 무거운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문사이로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남편의 뒷모습이었다.
"아니, 언제 돌아오셨어요?”
4개월 만에 찾아온 무심한 남편!
남편은 마루에 앉아 김 선생님과 술잔을 기울고 있었다.
“아주머니 이 양반을 찾아왔습니다.
글쎄 이젠 의사 선생님이 되어 왔습니다.”
덕이 씨는 놀라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대로 서버렸다.
“글쎄 그동안 어디 숨어 있는가? 했더니 밤낮을 독학을 해서 한의사 시험을 보았답니다.
합격통지를 받고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사람입니다.
하하하” 그제야 덕이 씨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집은 곧 잔치분위기가 되었다.
군상 씨는 그동안 정부가 실시하는 한지의사 자격증을 받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왜 부탁한 박 노철 씨 집에 가지 않고 이 고생을 하였냐고 하였지만 이젠 지나간 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 이젠 남한에서도 밥은 먹고살게 생겼소!
내가 열심히 환자만 돌보면 우리 종규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수가 있을 것이요.
나는 종규를 의사를 만들 작정이요."
온 식구가 잠도 안 자고 그동안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며 새날을 맞이하였다.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요구하였다.
돈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자비로 발전된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나고 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그리고 노력만 한다면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낯선 남쪽의 땅이라면 오직 노력만이 희망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 한지의사 자격증을 받고 기쁨과 희망에 불타고 있었던 그때 군상씨의 나이 40세였다.
21장 일본총독 이토히로부미
1909년 일본제국주의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
하얼빈에서 안 중근 의사가 쏜 3발의 총탄 사건이 일어났다.
이토히로부미는 20분 만에 사망하고 안중근의사는 몇 달 후에 중국에 있는 일본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안 중근 의사와 그 당시의 독립투사들이 이등방문이 저지른 죄를 밝혔는데,
국모인 명성황후를 죽인 죄를 첫째로 꼽았다.
고종 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을사조약을 맺고 독립 운동하는 조선인을 사형시키고
철도 광산 산림 농지 등을 강제로 빼앗아가고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하고
조선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포함되었다.
조선을 식민주의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 침략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그의 부질없는 국가에 대한 미친 충성심하나가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끝없이 전쟁으로 질주하는 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태평양전쟁까지 의 도발로
그 전쟁을 막기 위한 2개의 원자탄이 일본에 떨어졌다. 원자탄은 일본국민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9만 명을 죽였다. 18만 명의 부상자와 20만 명의 이재민을 만들었다.
인간뿐 아니라 땅까지 병들고 망하게 하였다.
일본이 노동력이 모자라 강제로 데리고 간 한국청년들도 노동과 빈곤에 허덕이다가 히로시마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중국에서는 인간 생체시험 731부대가 있었고 한국 중국 소련 인이 그 부대에로 끌려가면 마루타가 되어
생체 해부로 살아 나오지 못하였다
무지한 전쟁은 발굽소리도 없이 사람을 쓸어내고 지나갔다.
이웃이 좋아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좋은 이웃을 만나지 못하여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노동자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한 할아버지들 위안부할머니들!
일본정부에 대한 원한소리가 아직도 화산의 불씨처럼 터지면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누가 무슨 이유로? 무슨 권리로? 죽음까지 몰고 가는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백만분의 일, 행운으로 세상에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 그것을 다 누리고 갈수 있어야 한다.
어떤 개인이? 아니면 어떤 권력자들이? 그것을 무시할 권리가 있는가?
몇 사람이 더 잘살기 위해서?
자기 자손을 위한다는 사명으로?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귀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내가 소중할 때 상대방도 소중함을, 내 민족이 소중하면 다른 민족도 소중한 것이다.
세상은 변하였다.
이제 역사적 사실을 속일 수도 없게 되었다.
한국 사람은 침략을 할지도 모르고 침략이란 단어자체도 싫어하며 평화롭게 살아왔다.
왜 이등방문을 까지 몰아넣어야 했는지?
다른 나라를 지배할 생각은 지워야 할 때이다.
한국 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단일 민족으로 시작하여 사실상 몽고족과, 얼굴이 희고 작은 일본의 아이꼬 족이 조금 흘러들어왔고 ,
말레시아로부터 온 해에 그을린 얼굴, 칭기즈칸의 상승시대에 밀려난
중국의 조상 한 종족이 내려와 이루어졌다고 백과사전은 대강 진술하고 있다.
보면 또 일본도 마찬가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백제의 왕 묘가 발견된 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시대가 왔다.
일본의 조상은 한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 드렸고 한국 사람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조상이 하늘로부터 솟아나지 않고 인류의 발상지 디그리스강과 유브라데스 강을 근원으로 하여
중국으로부터 흘러온 민족이고 보면 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피로 섞여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날 때부터 몽고적의 특징인 푸른 반점을 가지고 나왔다면 조상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안다는 것은 겸손해지고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족보를 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서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자기 좋은 대로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불신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동조하며 앞으로는 사이좋게 살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 패배한 총리 도조 히데 기는(1941-1944) 진주만을 기습한 범죄로 교수형에
고이소 쿠니아키(1944-1945)도 패전 후 종신형 복역 중에 사망하였다.
항복문서에 사인한 마지막 일본 총독은 9대 아베 노부유키이었다.
아베노부유키는 마지막 충독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는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말한다. 전쟁은 멈추고 너희 나라에서만 충성하고 잘 살기를 응원한다.
총을 먼저 가졌다고 날뛰던 옛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 말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 하나 전쟁은 지옥이다.
사람을 죽이는 미친 짓이다.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군상 씨는 해방을 바라보는 이 시대에 한지의사가 되었고,
고향을 등진 남한의 외로운 땅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인생길에 서 있었다.
22장 한지의사로 출발
사귄 동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뒤로는 칠봉 산이 평풍처럼 쳐있었다. 그사이로 맑은 물이 데굴데굴 바위사이로 내려오며 바닥의 모래알까지 비쳤다. 계곡의 무성한 수림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아래로는 밤나무들이 여기저기 서있었다. 이 풍경은 자연을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꿈을 주는 곳이었다.
“김 선생님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은 산수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제 아이들은 이런 곳에서 키우고 싶습니다.
사람은 이런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심성이 맑아지지요
나도 김 선생님 곁에 자리를 잡아야겠습니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고 사모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아버지는 내촌 다음의 사귀 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자신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덕정 리 에 자생한약방을 열고 출퇴근을 하였다.
자생한지의원 그 읍에서 제일부자인 최 영근 씨 집에다 차리게 되었는데, 그때는 병든 사람은 많아서 간판을 달자마자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밤을 새우며 책을 들여다보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였다. 그때 많았던 늑막염이나 복막염은 보름 만에 완치할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되었다. 갈수록 손님은 더 많아져서 그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소문은 소리 없이 바람결을 타고 사방으로 흘러나갔다. 더구나 돈 없는 급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사정을 하면 아버지는 괜찮으니 돈을 벌면 언제든 가져오라고 당부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찾아왔다.
자생한지 의원
날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전해져 갔다. 돈이 없어도 먼저 치료부터 해준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귀를 열고 감동이 된 것이다.
하루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 저도 한의사인데 한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손님이 줄을 지어 기다릴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정말 약값을 미리 받지 않고도 의사를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보시오 나를 탓하러 왔다면 잘못된 생각이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돌봐줄 의무가 먼저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으나 생명은 잃으면 돈으로 살 수가 없는 것이오. 지금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소. 나도 빈손으로 이북에서 쫓겨나다시피 내려온 사람이요 돈이 없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불쌍하게 죽어가는 사람, 특히 이북 사람들이 나를 믿고 찾아오는 것이요.
언제 가는 그들도 나처럼 돈을 벌게 될 것이요.
언제든 돈이 생기면 그때 갚아도 되지 않겠소?”
정말 그랬다.
사람들은 추수 후에 곡식을 들고 찾아왔다. 시장에서 돈을 벌면 빚을 갚으려고 명절에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빚을 갚지 못하면 열심히 일을 해주고 떠났다.
그 시절에 정부에서 주는 식량배급이나 석유배급을 받으려고 줄을 길게 서던 때였다.
한지의사, 그 집 앞에 아픈 사람들이 식량 배급소 보다 더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던 사실을 믿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그만큼 가난 속에 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그들의 행복이었고 희망이었다.
23장 무릉도원
돈을 벌자 군주씨는 그 주변에 있는 산과 논과 밭들을 샀다. 빛과 논을 팔겠다고 옆에 살고 있는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그리운 고향에 두고 온 땅을 생각하였다.
원산 비운리에 무릉도원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중국에 나오는 그 무릉도원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우리도 이곳에 나무를 심고 무릉도원을 신나게 만들어보자. 아버지는 일꾼을 시켜 자두나무 앵두나무 등 과일나무를 사들였고, 우리는 그 곳 만평에 줄을 재고 나무들을 나란히 나란히 세워 아버지를 도와 밤나무를 심었다. 양주밤이 가장 좋다고 평가하는 것은 밤이 세알씩이 들어있는 것이 많았고 크고 맛이 있었다.
양주는 땅을 파고 밤을 가마니로 덮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일 년을 두어도 바람과 지형 때문인지 썩지 않고 싱싱하였다.
온 가족이 마음을 합쳐 땅을 파고 심은 밤나무가 싱싱하게 자라 나기 시작하였다. 나무를 심고 꽃을 바라보고 열매를 손안에 쥐어 보는 것, 그것은 산속 스님들에게 배운 아버지만의 행복 철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후에도 우리들에게 말하시기를
“ 이곳에 더 많은 밤나무를 심거라. 이 땅은 팔아서는 안 된다.
항상 나무들을 가까이 하고 살거라. 자손이 번창하려면 정직한 마음과 자연이 친구가 되어야 한다.”봄, 여름 가을 겨울, 꽃이 피고, 새가 찾아와 노래하고 다람쥐가 찾아들고,
햇빛이 머물다 간 뒤에 풍성한 열매를 달고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땅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아버지는 자연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3만 평이나 되는 곳에서 자랄 이 밤나무들
행복과 소원으로 힘차게 자랄 밤나무들 푸른 잎새들을 팔랑거리며
이 나무들은 진실로 아름답게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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