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 마지막 선비 정치인으로 추앙받아
제7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는 야당의 원로 운재 윤제술 선생의
제15기 추도식이 지난7월24일 낮 12시 백산면 석교리 선영에서 있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유청 회장을 비롯해 장성원 의원, 곽인희 시장, 김진배 전국회의원,
운재선생기념회원 등 50여명이 참석, 선생의 넋을 기렸다.
후배정치인과 제자들이 주축이 된 운재 윤제술선생추모위원회(위원장 유청·전국회의원)는
매년 7월24일 선생의 묘소에서 추모식을 갖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
운재선생을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흐뭇하고, 그리고 선생이 계신 자리에는 언제든지 고담준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국가의 대사가 있었고, 예술이 있었고, 많은 해학과 유머가 있었습니다.…
내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지도와 영향을 준 분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어른을 잊을 수 없고 평생을 두고 흠모하고 받들 것입니다”
1986년 7월 운재 윤제술이 작고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당시 민추협공동의장)은
이 땅의 마지막 선비 정치인에게 이같은 조사를 바쳤다.
윤제술 또한 김대중을 특별히 아꼈고 그의 회고록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인간의 힘 이상의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라면서 국가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또한 함석헌 선생은 "운재는 가히 뚫린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년들에게 의리를 가르칠 뿐만이 아니라
교단을 고수하기보다는 능히 시세의 물결을 타고 건곤일척의 돛을 달아볼 만도 하니 말입니다"라며
교육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윤제술을 높게 평가했다.
-17세까지 한학에 전념하다-
선생은 1904년 음력 1월 29일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앙청마을에서 3남 3녀 6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구한말 망국의 기운이 감돌던 격동기였다.
그는 7살 때 동네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고, 이어 사자소학, 동몽선습을 배우는데
이것 역시 한 열흘정도에 끝을 내니 마을에서는 신동이 나왔다고 했다 한다.
또한 9살 때는 전주로 나가 심농 조기석선생에게서 2년동안 글을 읽지 않고 오로지 글씨만을 전공했다.
그는 14살 때 이웃 요교리의 3살 위인 송이순씨와 결혼했는데, 그의 처가는 전북이 낳은
서예대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집안으로 강암은 윤제술의 4촌 처남이 된다.
결혼 후 그의 선친은 그를 처가로 보내서 공부를 하게 했다.
이른바 요교리는 문촌이었고 그의 처숙이자 강암의 선친인 유재 송군장 선생이 문필가로 이름난 큰 선비였기에 그
문하에서 글을 읽게 했다. 이 때에 비로소 유재 선생으로 부터 운재(풀향기 운·집 재)라는 아호를 받았다.
운재는 나이 15살 때 부안 계화도에 칩거하고 있던 간재 전우(1841-1922)선생의 문하에 들어 소학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반쯤 되었을 때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 뒤로 개화의 물결은
서해의 파도를 넘어 이 외딴 섬에도 더욱 세차게 밀어 닥쳤다.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운재는 계화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운재의 입장에서는 구학문과의 작별이기도 했다.
-신학문 위해 서울 유학-
신학문을 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다. 1년여를 보내고 나서
이듬해 중동학교에 들어가기로 하고 입학시험 전날 상투를 잘랐다.
14살 때 장가들면서 틀어 올린 상투를 21살에 잘랐으니
8년간이나 머리위에 기고 다닌 상투였기 때문인지 상투가 툭 떨어지니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당시의 중동학교는 보통학교 과져올 이수한 학생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 과정인데,
서당 물림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중동학교 3년 수학 후
자격시험을 치러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제도 때문에 1년을 독학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1925년 21살에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학생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합격했다.
그때 영문학을 택한 것은, 동양을 대표하는 한학을 어느 정도 배웠으니 서양을 대표할만한
학문을 갖추어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고 한다. 봉건사상에 젖어있던
그는 그곳에서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윤제술은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간, 그리고 보성중에서 3년 남짓, 성남중에서 2년여를 근무했다.
성남중에서는 교장이 일제에 아부하느라 영어과목을 폐지토록 하자, 이에 항의 교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익산의 남성고 초대 교장-
고향 김제에서 낚시를 벗삼던 중 해방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려 했으나
전주의 갑부 백인기씨의 미망인 이윤성 여사가 사재를 내놓아 설립한 남성중학의 초대교장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어
윤제술은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교장에 취임하되,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교장에게 인사권을 주고 재단에서 간섭하지 말라,
둘째는 교직원의 처우에 전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8년간 교장을 맡는 동안 남성을 사학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실력 있는 교사를 데려와 후히 대접했고,
그 대신 불쑥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참관했다.
또한 도 학무국이나 문교부에서 공부와 관계없는 부당한 지시가 내려오면 그냥 뭉개 버리기가 예사였다.
남성고의 강당이름 유성당은 그의 교육정신이 깃들인 그의 글씨다.
운재는 8년여의 남성 교장을 끝으로 교단생활을 떠났다.
그 때가 1954년 운재의 나이 51세였다. 29살에 중동학교에 첫 발을 디딘지 22년이 되는 해였다.
-정치 입문-
윤제술은 1954년 교직을 떠나 김제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50살로, 큰 부엌에 가서 큰손으로 살림을 맡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무소속으로 나온 그때 그의 별명은‘작대기’였다.
당시 자유당과 민국당 두개의 정당이 지게의 짐인데 그것을 받치려면 자신같은 작대기가 필요하다는 연설에서 연유한 것이다.
윤제술은 3·4·5대를 김제에서, 6·7·8대를 서울 서대문구에서 연속 당선되었다.
국회에 처음 들어갈 즈음 정국은 그야말로 혼미 상태였다.
사사오입 개헌사건과 대통령후보 해공 신익희의 급서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1958년 4대에 재선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천부의 연설솜씨로 일약 선배정치인들을 앞질렀고
때로는 투사로, 때로는 선비로, 정가의 주목을 받았다.
4대 때는 보궐선거가 실시된 강원도 인제지구에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1960년에는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대통령후보 유석 조병옥씨가 도미 치료 차 떠나면서 남긴
“낫는데로 지체없이 돌아오겠다”는 마지막 성명서를 작성했다.
5대 국회에서는 문교위원장으로 활약했으나 5·16 쿠데타로 정치정화법에 묶여 1년여를 쉬어야 했다.
정화법에서 풀리자 군사정권에 항거하면서 1963년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윤보선을 적극 밀었다.
참모장격으로 선거전략과 지원유세를 도맡다시피 했다. 당시 여수 유세에서는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제기, 눈길을 끌었다.
6대는 김제 갑·을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람에 조한백씨에게 양보하고
전라도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서울 서대문구로 옮겼다. 6대때는 제1야당인 민정당 원내총무를 맡았고
7대에서는 국회부의장으로 일했다.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격돌한 대통령선거에서는
사력을 다해 김대중 선거운동을 벌였다. 8대에서도 김대중을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았고
1973년 9대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다.
그는 말년을 인왕산 자락 종로구 누상동의 낡은 단층집 관산루에서 서예와 등산으로 보냈다.
그를 찾는 후배정치인과 제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글은 전북일보의 「전북인물 50인」과 「운재선집」(1989·성지사)을 참고하였다.
김익현 기자 desk@kimjenews.co.kr
<운재 연보 >
▲1904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출생
▲1918년 간재 전우 문하에서 한학수학
▲1920년 중동학교 입학
▲1925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1929년 중동학교와 보성중 성남중에서 16년간 재직
▲1946년 남성중고 초대교장 취임, 8년간 재직
▲1954·1958·1960년 김제에서 3·4·5 대 국회의원 당선
▲1963·1967·1971년 서대문구에서 6·7·8대 국회의원 당선
▲1964년 민정당 원내총무
▲1968년 국회부의장에 선출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 최고위원
▲1986년 서울 누상동에서 82살로 별세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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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민오기전 누상동 언덕바지의 집에서 만났던 외삼춘
이렇게 젊은이들이 다 외국으로 떠나서 어떻하나
그러나
외국에가서 좋은것을 배워 돌아와서 한국을 위해서 일해주길 바란다고
남편에게 부탁하시던 어르신
힘찬 붓글씨로 다시 돌아오라는 글을 적어주신 외삼춘
하얀 옷을 즐겨입으시던
우리가 존경하던 외삼춘을 기억하고싶어
내나이 더가기전에 이 기록찾아내어 여기에 남김니다
기자님 감사합니다
2018년 9월 21일
산여울(최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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