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편지 (단편소설)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져 도시로 떠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돌아와 서로 마주 쳤을 때
서로의 눈빛은 오래도록 마주보며 맑게 빛이 났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움이라할까?
쑥스러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헝클어져 있었다.
숙영은 아카시아 나무 밑을 걸으면서
석진 이 남긴 말이 짜릿하게 피부를 진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야!
이건 솔직한 내 감정이야
너를 다시 보는 순간 나는 그걸 느꼈어
너는 어때?”
그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알고 있었다.
“숙영 언니
나, 오다가 길에서 석진 오빠를 만났어.
일 년 만인데
석진 오빠가 그동안 너무 멋있게 변해있었어.
그 잘생긴 이마, 그리고 눈빛, 정말 황홀할 정도였어.
나 어떡하면 좋아
나 석진 오빠가 좋아죽겠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상기한 영애의 두 뺨을 보며
숙영은 가슴속에 흐르는 물결이 그대로 영애의 가슴을 요동치고 있음을 알았다.
숙영의 가슴에 돌이 내려 앉았다.
"석진 오빠도 알고 있어?"
영애는 두발로 땅끝을 두둘 기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니.
만나게 되면 내 심정을 그대로 고백할거야.”
철없이 순진한 영애는 들떠있었다.
이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숙영은 소나무 밑을 내내 혼자 걸었다.
그녀는 영애와 친자매는 아니다.
그러나 자매로 연결된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외할머니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북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숙영의 어머니는 이남 시골에서 혼자서 지내고 있는 어머니에게 딸 숙영이를 보냈다
어린숙영이가 남쪽에살고 있는 친정 어머니에게 벗으로 맡겨진 사이에 6 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어느 사이에 심각해졌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오고 가지 못하도록 삼팔선이 이북과 이남을 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부모형제를 찾아다니며 밀려다니며 어수선한 사이 전쟁은 끝나고 있었다.
숙영은 너무 어렸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오고 갈 수 없는 삼팔선
부모와의 생이별이었다.
철이 나기도 전에 그녀를 슬픔의 늪 속에 가두어놓았다.
할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난 엄마와 같이 살 수 잇었을 것인데
그렇지만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신분이야 원망할수는 없어"
세월은 할머니와 같이 시골 땅 에서 흘러갔다.
할머니가 안타까워하는 그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할머니는 그녀를 영애의 아버지인 북한산 아래 서울 평창동 으로 이사한 외 아들에게 부탁하며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없으면 저 불쌍한 것이 어디다 정을 붙이고 살거나?
내가 너무 외로울까봐 맡기고 간 것이 어린것이 갈 곳이 없게 되었구나.
“어머니 아무걱정하지 마세요
.
저도 딸이 하나이니,이젠 제 딸로 입적시켰으니 잘 키우겠습니다.
숙영이가 부모를 다시 만날 때까지 말 이예요.
외삼춘과 외숙모는 지식인이었고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두 분이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셨기에 숙영이가 크는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음악선생인 외숙모는 그녀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쳤다.
노래를 잘 부르는 숙영은 마음이 아플 때는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었다.
학교 음악회가 다가오면 영애는 피아노를 치고 숙영은 고운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둘은 잘 어울리는 자매가 되었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슬픔을 닦아주기 위해 외삼춘과 외숙모는 깊이 노력하였다.
숙영도 그들을 부모처럼 대하고 감사하였다.
숙영과 영애가 알고 있는 석진 은 그들의 소꿉동무였다.
어려서 동산을 오르내리고 운동장에서 뛰고 숨 박꼭질을 하던 친구였다
세월은 두 자매에게 사랑의 그림자를 키우며 다가왔다.
그런데 그 나무의 숲이 사랑의 숲이 지금 두 자매를 깊이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그곳엔 포프라 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가득하였다.
바람소리가 쉬쉬거리며 햇빛 속을 지나갈 때
잎사귀들이 반짝대며 앞뒤로 팔랑대었고 가을이 되면 우수수 떨어져 대지를 휘덮었다.
집은 모퉁이에 있었다.
구름 속에서 나온 박하사탕 같은 달빛이 유난히도 밝았고, 별들이 하늘 속에 굵은 소금처럼 깔려있었다
휘휘 불어대는 바람소리가 낙엽을 이리저리로 몰고 다니며
대굴대굴 현관 앞으로 굴러가고 날개가 돛인 듯 불빛 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길 건너오던 자전거가 전신주 불빛아래 멈춰 섰다.
“이 밤중에 ?”
창 앞에 서서 가을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던 숙영은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있었다.
어둠 속에서 숙영아 숙영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잠간 들렸다.
그녀 가 다시 망설이다가 현관 앞에 섰을 때는 석진은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숙영의 가슴에 가느다란 전류 가 흘러내렸다.
“석진 씨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는 어둠 속 두고 간 상자를 보았다.
불빛에 비춰진 상자는 그녀를 아픔 속으로 깊이 몰아넣었다.
그것은 그동안 숙영이 보냈던 연애편지 상자였다.
그녀는 맨 위에 덮여진 사각 난 봉투를 힘없이 집어 들었다.
잘 접혀진 편지를 열자
붉은 단풍잎이 땅으로 떨어졌다.
숙영은 조심스럽게 단풍잎을 집어 들었다
.
한손에 단풍잎을 들고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숙영에게
그동안 보냈던 이 편지들을 돌려보내는 이 심정을 짐작이나 할까?
지금이라도 내 발길을 너에게로 다시 돌리고 싶다.
그런데도 왜 나는 너의 소원을 그대로 들어야만할까?
그래, 나 영애와 결혼 하겠어.
영애가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사고를 낼 것 같다는 너의 말
영애를 만나보니 그대로 였어.
나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를 원망하며 너를 아프게 사랑해야한다는 사실이 정말 견딜 수가 없어.
나 죽고도 싶다.
그러나
생각해 봤어
깊이 깊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떠나고도 싶었어.
그래 그런데 너의 마음을 다시 읽게 되었어
이 땅 어느 곳에서든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마음을 전하는 이 심정
그래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잘 지내
항상 너의 행복을 바랄게
그리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나도 너처럼 살아 있을 게.
숙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없는 세상은
나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야
석진
석진씨
미안해
심장이 멎을 듯, 먹 구슬이 어둠 속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창밖의 바람소리에 포프라 나무들이 우둑우둑 떨고 있었다.
봄에 석진 이는 숙영의 말대로 영애와 결혼을 하였다.
영애는 피어나는 장미처럼 화사하고 행복해보였다.
숙영은 깊이깊이 두 사람을 축복하고 싶어 하였다.
전쟁은 슬픈 것이다.
“어째서 나는 부모도 없이
이런 운명 속에 서 있을까?”
나도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이 선택 밖에는.....,
오월의 햇볕이 마루위에 따뜻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로빈이 울고 있는 정원으로 나왔다.
새록새록 아직도 피어있는 봉숭아꽃을 코끝에 대며 벚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든 가느다란 빛줄기들을 보았다.
살고 싶은 욕망, 그녀가 그렇게 지쳐있었던 순간에도 이 나무 밑에서 이 조그만 햇살 밑에서 봉숭아는 향기를 꽃을 피
우고 있었던 것인가!
그녀는 앉아서 차근차근 흐드러진 꽃잎을 따주기 시작하였다.
“우린 서로가…….
아니야,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소중한 기쁨이었어.”
난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온 후, 조용히 마음의 창문을 닫아버렸다.
두 사람의 결혼 후 그곳에서 살겠다던 숙영은 서울을 떠났다
숙영은 할머니가 살던 고향에 머물기로 하였다.
중학교 선생 발령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곧 떨어졌다.
하얀 아카시아 꽃 같은 그녀만의 미소가 다시 찾아 들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같이 꽃밭을 만들었다.
봉숭아 채송화 접시꽃 씨를 뿌리고 분꽃도 국화꽃도 심었다.
강둑 위로 다듬어진 산책길을 걸었고 소나무가 자라는 동산 언덕에 앉아서 흰 구름의 난무를 바라보았다.
잡풀 속에선 솜털박이 보랏빛 할미꽃이 눈부시게 피어났고
해당화가 가시덤불사이로 분홍빛 얼굴을 들고 초록 잎 속에서 반갑다고 살랑대었다.
“아! 여기는
할머니가 남겨준 진한 흙이 있었구나!”
그녀는 교단 위에 꽃아 논 산나리 꽃을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에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누가 산나리 꽃을 꺾어 다 내 책상에 꽃아 주었네요.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산나리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을까?”
“알아요! 알아요! 선생님”
초롱초롱 맑은 눈들이 그녀 앞에서 채송화처럼 웃고 있었다.
“그럼 이다음엔 꺾지 말고, 우리 모두 그곳을 찾아 소풍가기로 해요.
이렇게 향기를 피우는 꽃잎은 산에서 보면 더 아름다울 거예요.”
“좋아요 선생님! 선생님!”
아이들은 따뜻하고 행복하였다
그녀의 슬픔은 이제 벽을 내리고 그 뒤로 숨은 듯하였다.
적어도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고, 맑은 새소리를 듣고 있었고,
들판에 피는 신선한 꽃들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아 이 산천에 피어나는 이 작은 풀꽃들도 자기대로의 삶을 잘 피워내고 있었네요.
이 클로버 속에 제비 입술처럼 잉크 빛으로 피어난 오랑캐꽃을 보아요.”
참 예쁘지요?
그녀는 아이들 마음속에 들꽃도 심어주고 있었다.
잡초들이 고개를 들고 아침이슬을 달고 있을 때
그녀는 자연의 신선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서로 보지 않으면 사랑이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것을, 나는 그동안 왜 그런 불길 속에 서있었을까?
왜 나는 숨 쉬는 것 마저 괴로워하였단 말인가? “
그녀에게 고여 있는 나날은 그렇게 지나가면서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포프라 나무 잎들이 반짝 반짝 앞뒤를 뒤집으며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었다.
새로 부임한 선생은, 탄탄해 보이는 체격에 그을린 색깔, 활짝 핀 해바라기 얼굴이었다.
그는 자기이름을 김 영철 이라 소개하였다.
그는 복도에서 숙영 이를 만나자 깍듯이 아는 사람처럼 인사를 하였다.
그녀 는 고개를 끄덕하고 조용히 지나쳤지만 어디서 본 기억은 전연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마주쳤을 때 그는 싱글벙글하며 다가왔다.
“저 기억 못하시겠어요? 숙영 씨.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나다니요.”
“글쎄요? 저는…….”
“아아, 기억 못하시는군요.…….언젠가 새마을운동
농사일을 도와주러 갔을 때, 벽촌에서 만난 적이 있잖아요.”
그녀는 갑자기 얻어맞은 듯, 자세를 고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에, 어렴풋이 새까맣게 가마솥처럼 타버렸던 한 청년의 얼굴빛이 떠올랐다.
그는 그 동네에 미리 왔던 팀으로 석진 과 대학교 절친한 친구라 하였다.
“아 네…….”
“사실은.
저도 이곳에 솔선해서 온 사람입니다. 하하하 숙영 씨처럼 말입니다.”
그녀 는 이 화창한 대낮같은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건 내고 싶지 않았다.
조용했던 그녀의 마음에, 석진 의 이름만으로도 다시 파도를 일고 있었다.
영철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석진 이가 무척 부러웠지요.
숙영씨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살다보면 그런 사랑 이야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녀는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제가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숙영은 등을 돌리고 그곳을 떠났다
학교 안에서 그와의 마주 침은 자주 있었지만, 그녀 는 그 앞을 지날 때면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그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루는 그가 앞을 막으며 다가왔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일부러 저를 피하시는군요?”
그녀의 서투른 시선은 새 운동화 끝에서 머뭇거렸다.
“숙영 씨를 불편하게 한다면 제가 이곳에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실은 저는 숙영 씨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반갑게 찾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전처럼 명랑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설명하고 있는 그는 낯설고 초조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숙영은 난처한 듯 그를 바라다보았다.
“영철 씨
저는,
사실은 석진 씨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녀는 침울하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 아 미안해요
제가 그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반갑고
저는 숙영 씨와 만나고 싶을 뿐인데…….”
“사실 영철 씨 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영철 씨를 보니 마음이 ......,
숙영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땅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 저 때문에 불편해서 이곳을 떠나실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곳은 제가 자란 곳인데 찬찬히 돌아보면 아름다운 곳 이기도하구요“
“아! 네!”
그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에 영철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숙영 이
아이들과 들판에 나갈 때나
혼자서 들길에 서있을 때나
둑 언덕에 혼자 앉아서 바람소리를 들을 때 영철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하하하 숙영 씨 ”
“이 개울 물소리를 들어 보세요” 한다던 지
“숙영 씨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인가요?”
“시골의 여름 매미소리는 참 듣기 좋지요.”
매미는 칠년 동안 잠자듯 있다가
이렇게 신기한 날개 짓을 하며 노래하며 나온다지요.
둘은 매미가 울고 있는 석류나무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곳 풍경에 매료되었습니다.”
영철은 결국에는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듯 숙영에게 묻기도 하였다.
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감수성이 강한 그녀의 마음속에도 자연의 이치대로 애잔한 가을 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산다는 것과 죽음의 차이점은 없어요. 죽음은 다시 시작되는 준비니까요.
생명이 연속 된 다는 것,
생각 없이도 그저 연속된다는 것은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 시간들을 저는 동경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불꽃처럼 타고 싶었지요. 사는 동안엔 말 이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어느 삶이든 뜻과 의미가 있으니까요.
삶에 대한 영혼의 갈증을 느끼며 그녀는 때때로 그리움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숙영 씨
숙영 씨는 외로움을 앓고 있는 소녀 같아요.
누군가가 말해준 숙영 씨 모습그대로예요.
그래서 숙영 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그 말이 지금실감 나네요.”
“숙영 씨는
내가 보기론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나가야 될 것 같아요.”
글쎄요......,
숙영의 심장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 그 것 뿐이었다.
가운데로만 세차게 흘러 보내는 물줄기 같은 것이었다.
“영철 씨
전 여기 밖에 있을 곳이 없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가고 싶은 곳도, 갈 데도 없어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에겐 이곳이 마지막 선택이었으니까요.”
“숙영 씨
마지막 선택이라 구요?”
“숙영 씨
사랑은 지나가는 바람일수도 있어요.
폭풍이 나무를 뿌리 채 흔들어도 잠잠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거든요.
어쩌면 영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믿고 싶은 희망 같은 것이지요.
실제론 또 다음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영혼까지 떨 수 있는 …….그런 나무들의 모습이 진실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숙영 씨는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보세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저의 어머님 어려운 결혼을 하셨어요.
부모님의 반대에도 죽기 살기로 사랑을 했어요. 그리고 저를 낳았지요.
그들이 좋아하던 시절은 단 3년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한집에서 산다는 것은 웃은 일이지요.
사랑은 여러 가지 빛깔을 가지고 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것이지요.
불꽃같은 사랑에 결혼을 하였어도 사랑의 감정은 연결되지 않아요.
서로를 더 이상 자극하는 신선함을 잃을 때 사랑은 풀어지고 지워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 맹이같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단지 사람들은 그런 사랑이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면 순수하게 간직하려고 해요.
그런 순간들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갈 뿐 이예요.
숙영 씨
저는 진실한 사랑을 믿고 싶어요.
그러나 그 사랑의 본질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사랑은 지나가는 바람이나 구름 같은 …….
단지 지나간 구름이나 바람을 향해 목숨 바치는 것으로, 또 남아 있는 생의 커튼을 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숙영 은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영철 씨의 마음을 읽고 있었지만 , 지금은 자연만이 슬픔 없이 그녀에게 다가 왔으며
자연 속에 돌처럼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녀의 정신적인 고독한사랑은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쓸쓸한 가을 잎이 흩어지고 계절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숙영 씨
솔직히 저는 숙영 씨를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제 마음은
그때 처음 본 숙영 씨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석진 이, 그 친구 아니었으면 저는 그때 숙영 씨를 계속 귀찮게 했을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저는 한 순간의 사랑에 도취되고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제가 서울로 친구를 찾아 갔을 때 영애 씨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젠 숙영 씨도 행복해져야할 차례입니다.”
숙영 씨
우리가
이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행운 그 자체입니다.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런 행운이 올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억 만분의 하나로 선택받은 삶의 행운일지도 모르지요.
저는 이 세상이 준 선물을 느끼고 사랑하며 그 시간을 살다 가고 싶습니다.”
“숙영 씨 와 같이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숙영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몸 전체를 흔들기라도 하는 듯 섬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거부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영혼의 철저한 몸부림처럼 전달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고 너무 순수하여서 영철은 더 이상 그곳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철은 읽고 있었다.
“왜 그녀가 그곳을 마지막 선택이라고 했는지를
그 곳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음을……
그녀는 부모에게 받을 수 없는 사랑과 줄 수 없었던 사랑이
오직 이곳 자연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사랑은 그녀가 안고 가야 하는 그림자 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연결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림자
그녀가 선택한 외로운 사랑이었다.
겨울바람이 불어오자 영철은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자존심은 그곳에 더 머물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눈이 추위를 몰고 와서 얼어붙자, 논은 아이들의 썰매장이 되었다.
그녀가 빙판으로 나가 아이들과 썰매놀이를 할 때, 영철은 가방을 메고 버스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
그녀도 아카시아 같은 미소를 보내며 , 가슴이 미어지는 비애의 순간을 느꼈다.
영철씨 미안해요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
불꽃을 지우는 얼음 같은 사랑
그녀는 얼음이 노란풀잎과 엉켜있는 방죽 길을 타박 타박 걸으며
항상 그녀를 위로해주던 할머니를 생각하였다.
그녀를 사랑한 영철은 그가 말한 것처럼 바람이었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손을 흔들고 그는
한번 쯤 텅 빈 버스 안에서 눈물을 느꼈을까.
영철이 간 뒤로 함박눈이 며칠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나뭇잎에 소복이 싸인 눈들을 털면서 손안에 녹아내리는 눈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만이 그녀에게 생명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꽁꽁 언 땅이 굳었던 풀기를 흐늘흐늘 풀고 개울물도 살얼음 옆으로 속살을 내비치면서
밭에서는 보리이삭이 파릇파릇 더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다.
나도 이 자연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겠어.
그녀는 들길을 걸으면서 재잘거리며 흐르는 개울 물소리와 잔잔한 풀잎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숙영은 다시 꽃씨를 뿌리고, 여름의 백일홍 꽃잎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철 씨의 엽서 한 장이 날라들었다
.
또다시 가을바람이 산들거리며 들판을 지나갈 때
영애의 소식이 영철 씨의 엽서 속에 들어있었다.
영철 씨의 엽서는 간간히 그해 겨울을 알리고 다음 봄을 알리고 여름을 알리면서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그녀는 강둑길에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는 동안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흐르는 물살위로 같이 뛰놀던 석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왜 나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그런 약속을 하였을까?
그러나 그 때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는 그들과 마주설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후회하였다.
그녀는 밤이면 밤하늘에 뿌려 논 별들을 바라보면서 마당을 걸었다.
영애도 석진씨도 둘다 보고 싶어.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갈라놓았을까?”
날이 갈수록 그리움은 물길을 파면서 흐르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 도시로 떠나고 점점 그곳은 쓸쓸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영애와 석진 씨를 단 한번만이라도 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봄방학이 오면 서울을 다녀 와야겠어.
약속 같은 것은 생각지 말자, 영애를 만나야 해.
이젠 모든 것을, 이젠 지울 수도, 또 이길 수도 있어.”
그녀는 소식 없는 영애와 석진 씨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찾아 들었다.
햇살이 빨래 줄에 눈부시게 흘러내렸다.
푸른 제복을 입은 우체부가 찾아와 편지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말 오랜만에 영철 씨로부터 온 편지봉투였다.
편지를 읽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이럴 수 는 없어
그녀는 불이 난 듯 옷을 갈아입고 기차 정거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쌩쌩 불어 대는 서울역 광장에서 영철은 숙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6년 만에 다시 돌아본 서울거리는 낮 설었다.
영애는 서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석진 씨도……그곳엔 없었다.
숙영은 기운 없이
낙엽이 딩구는 옛날 석진이와 거닐던 덕수궁 돌담을 영철씨와 걷고 있었다.
옛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기운을 잃고
가로수에 머리를 대고 서버리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숙영 씨
그들의 이민 소식을 늦게 드려 미안합니다.
미안 합니다 숙영 씨.
영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숙영씨 잠간 다방에 들어가 차라도 마시지요.
숙영은 영철씨가 인도하는 다방 “꽃”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앞에
뜨거운 생강차와 커피가 나란히 놓였다.
영철은 숙영의 얼굴을 살피며
반으로 접힌 편지를 포켙에서 꺼내었다.
봉투는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숙영 은
떨리는 손끝으로 빠르게 뜯어냈다.
숙영 언니
처음엔 나도 언니를 다시 안 만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살 수 있다고 생각 했어……. 그런데 길이 없었어.
나는 그곳에 내려가 숨어서 언니를 보았어.
들길에 앉아있는 고독한 언니를 보았어.
그리고 우리는 힘없이 돌아 서야 했어.
우리는 이민을 가기로 했어
언니, 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언니가 보고 싶어서,
언니 이젠 우리 만나지 말자는 약속은 지워줘.
언니가 보고 싶어.
언니, 나
석진 씨와 헤어지게 되었어.
......,
왜? 헤어지게 되였냐고 묻지 말아줘.
언니
정말 미안해
난 어려서부터 언니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던 다 가져야 했잖아.
언니가 좋아하던 인형도
만년필도 크레파스도 모두 빼앗았던 것
언니는 왜 그때마다 말리지 않았어?
미안해 언니
이게 지나간 내 잘못이고 내사랑이야
사랑은 바람 같은 것.
그저 바람 같은 것이었어.
내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바람 같은 것 이었어.
언니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그건 자유야
차라리
이젠 나도 살 것 같아.
미안해 언니
지금 석진씨가 많이 아프데
감기 같은 것이 아닌가봐.
바람결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언니를 보고 싶어 해.
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해.
나처럼 언니를 보고 싶어 하나봐.
편지지 위로 눈물방울이 우 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눈을 닦아 내며
먼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마른하늘에서 낙엽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애 편지다.
그래 연애 편지
숙영아
저 낙엽을 봐
내가 다 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야"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이던 석진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들리는 듯하였다.
그녀는 단풍잎 하나를 집어서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포켓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 속에 단풍잎 을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펼쳐 넣었다
불 타는 연애편지 하나가
하얀 수첩 속에 아름답게 누웠다.
미안해 석진씨.
우리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어.
정말 좋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어.
다음 세상에
전쟁이 없는 다음 세상에
나 다시 태어 나고 싶어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
석진씨
그때만나면
이 연애편지
읽어 줄 수 있겠지
보고 싶어 석진씨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던 물이
우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비처럼 앉아 있는
연애편지가
물을 머금고 있었다.
2005년 1월30
2016년 11월19일
산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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